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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대 Nov 28. 2019

영화 <천국과 지옥(天国と地獄)>에 관하여

1961년, <요진보(用心棒)>와 <츠바키산쥬로(椿三十郎)>라는 시대극을 발표한 뒤 현대극을 구상하고 있던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은 즐겨 읽었던 에드 맥베인(Ed McBain)의 소설 <왕의 몸값>을 영화화 하기로 결정, 바로 이 영화 <천국과 지옥>을 만들어낸다.  



원작을 영화로 만들게 된 동기는 두 가지로 "철저하게 디테일에 치중한 추리영화를 만들어보자"는 생각과 당시 유괴 범죄에 대한 형벌의 가벼움(미성년 약취(略取)유괴죄로 3개월 이상 5년 이하의 징역 <형사법 224조>, 영리(營利) 약취 유괴죄로 1년 이상 10년 이하의 징역 <형사법 225조>)에 대한 분노(구로사와 감독은 극장 개봉 당시 팜플렛에서도 유괴 행위를 비판했다)였다고 한다.


영화는 흥행했지만 개봉 뒤 4개월간 도쿄를 중심으로 유괴 사건이 빈발, 급기야 국회에서까지 사회문제로 다뤄져 <천국과 지옥>은 결국 1964년 형법 일부 개정(몸값 목적의 약취(무기 또는 3년 이상의 징역) 추가)의 계기가 됐다고 한다.


주인공 '곤도(権藤金吾)'라는 이름은 원작의 '고든 왕'에서 따온 것으로 알려져있는데 원작의 왕 이름은 '더글라스'였다. 그리고 더글라스와 달리 곤도는 유괴된 운전수의 아들 몸값 3천만엔을 놓고 고뇌한다. 남의 자식을 위해 돈을 내느냐, 남의 자식이니까 그냥 버리느냐의 갈림길. 이는 구로사와 감독이 심취해있던 도스토예프스키식 '선악(善惡) 대비'라는 것이 비평계의 정설이다.      



저 유명한 열차 시퀀스는 당시 일본 최고속 열차 코다마호를 직접 빌려 촬영했다고 한다. 차내 세면장의 창문만이 7센치 정도 열린다는, 영화상 중요한 트릭을 가지고 있었던 탓에 구로사와 감독은 철도청에 재차 문의했고 철도청 측에선 의아해하며 "당신들 뭐하는 사람들이오?"라고 의심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사카와가와(酒匂川) 철교에 접어드는 장면에선 민가 2층 부분(민가라기보단 공사장 조립식 숙소라는 기록도 있음)이 촬영에 방해가 되어 의뢰해 촬영 당일만 철거했다고 한다. 여튼 실제 열차운행표를 깡그리 무시한 이 씬에서 NG가 나면 2천만엔이라는 손실이 따르므로, 감독과 배우들은 본촬영 전 시나가와(品川) 차고에 정차 중인 코다마호에서 '진지한' 리허설을 감행했다는 후문이다.



유괴 영화이므로 제법 비중이 큰 아역 배우에 시마즈마사히코(島津雅彦)와 에기토시오(江木俊夫)가 발탁됐다. 각각 운전수의 아들 유이치와 주인공 곤도의 아들 쥰 역을 맡았다. 둘은 공개 오디션을 통해 선발됐는데 당시 경쟁률은 무려 1700대 1이었다고.  



영화 속 계절은 한여름이지만 실제 촬영은 한겨울에 이루어졌다. 배우들은 입김이 나지않도록 하기 위해 입안에 얼음을 물고 촬영에 임하기도 했다는데, 왜 여름씬을 굳이 겨울에 촬영하느냐고 범인역을 맡은 야마자키츠토메(山崎努)가 감독에게 묻자 구로사와 아키라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여름은 더우니까 금새 긴장을 풀어버리지. 겨울에 여름씬을 촬영하면, 어떻게하면 더워보일까 모두들 고민하지 않겠나.

구로사와 아키라  



츠바키산쥬로(椿三十郎)>에서 '동백나무만 컬러로 촬영할 수만 있다면'하던 구로사와 감독의 바람이 바로 이 영화에서 이루어진다. 범인이 돈가방을 태웠을 때 색깔 연기가 나도록 약품을 내장해놓은 설정을 통한 것인데, 비슷한 예로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의 <럼블 피쉬>와 스필버그의 <쉰들러리스트>같은 영화가 있다.


유괴 사건이 다뤄지는 98년작 <춤추는 대수사선 더 무비(踊る大捜査線THE MOVIE)>에선 주인공 형사가 흑백 배경의 굴뚝에서 색깔 연기가 나는 걸 보고 "<천국과 지옥>이다"며 범인의 위치를 찾아 검거하는 오마주 장면을 선보인 바 있다.



구로사와 감독은 범인 타케우치가 검거될 때 흐르게 할 음악을 최초 엘비스 프레슬리의 'It's Now Or Never'를 염두에 두었지만 저작권료가 너무 비싸 포기, 대신 원곡인 'O Sole Mio'를 삽입했다.



원래 라스트신은 구치소 지하-지상 통로에서 토구라 경부와 곤도가 대화를 나눈 뒤 헤어지는 장면이었다. 하지만 타케우치가 곤도를 붙잡고 울부짖는다는 아이디어가 구로사와 감독 마음에 들어 바뀌었는데, 물론 그것 역시도 다시 변경돼 결국 진짜 마지막 장면은 우리가 봤고 우리가 아는 셔터문 이다. 그것은 제목의 뉘앙스완 달리 지극히 현실적인 '부자'와 '가난한 사람들'의 계급 나눔이었다. 40도의 찌는 더위에 무방비로 노출된 가난과 에어콘이라는 문명의 혜택을 누리는 부(富) 사이에 타협점은 없는 것이라고, 그 무뚝뚝한 셔터문은 얘기하는 듯했다.


한편, 야마자키는 막판에 조명으로 달궈진 철망을 붙잡고 연기한 탓에 손에 화상을 입기도 했다. 물론 덕분에 감독으로부터 "자네 연기가 너무 좋아 그걸 엔딩신 삼기로 했네"라는 칭찬을 듣긴 했지만.  


<천국과 지옥> 이후 달리는 기차(전철)에서 현금 가방을 던지는 수법을 모방한 범죄들이 잇따라 구로사와를 당황케했다. 1963년 쿠사카지로(草加次郎)사건, 1965년 이니가타 디자이너(新潟デザイナー)유괴살인사건, 1984년 구리코, 모리나가(グリコ・森永)사건, 1993년 코후신킨오엘(甲府信金OL)유괴살인사건, 2002년 신시로시(新城市)공무원 유괴살인사건, 2004년 오사카(大阪)빠칭코부장 살인사건 등이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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