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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대 May 01. 2021

[영화 속 음악] 박하사탕

음악과 영화를 좋아한다. 지금은 음악이 더 좋아 '평론가' 씩이나 되는 직함을 달고는 있지만 나는 음악을 감상하는데 들이는 시간만큼 영화도 자주 보는 편이다. 그렇게 음악을 들을 땐 선율이 재촉하는 영상을 떠올려보고 영화를 볼 땐 그 안에 흐르는 음악의 뜻을 가늠해본다. 오늘부터 써볼 '영화 속 음악'은 사실 영화 비평도 음악 비평도 아니다. 그저 내가 살아오며 좋게 본 영화들 속 음악의 순간을 기록하는 것이랄까. 음악의 몽타주. 이 글들은 그저 음악과 영화를 함께 좋아하는 한 애호가의 텍스트적 몸부림쯤 되겠다.


<박하사탕> (이창동, 1999)




‘Opening’ by 이재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암흑에서 바늘 구멍만한 빛을 향해 기차가 달려간다. 이 기차는 시간을 거스르는 영화에서 유일하게 ‘실시간’을 통과하는 기차다. 이때 흐르는 ‘Opening’은 1995년 유재하 음악경연대회에서 은상을 받은 이재진의 곡. 차분한 보사노바 비트 위를 아련하고 슬픈 현악이 미끄러지듯 흐른다.


평범한듯 비범한 이재진의 음악은 영화 속 일곱 챕터의 일곱 차례 ‘시작’을 빼놓지 않고 알리며 작품 안에서 가장 긴 호흡을 이어간다. 곡들은 다 좋지만 특히 귀에 들어오는 건 두 파트로 나뉜 ‘경아의 옥탑방’이다. 경아는 주인공 김영호가 군산에서 잠복 근무 중에 하룻밤 스치는 인연. 비록 잠시 만나고 헤어지는 사이지만 경아는 김영호의 첫사랑 윤순임의 ‘실제 환영’으로 묘사되는 만큼 울먹이는 피아노와 바이올린의 속삭임은 이 시퀀스에서 적지 않은 비중을 갖는다. 이재진은 이틀만에 완성한 '경아의 옥탑방'이(원래는 하루만에 완성을 의뢰받았다고 한다) 앨범에서 가장 힘든 작업이었다고 했다.



‘나 어떡해’ by 샌드 페블즈



한국 대중음악사에서 대표적인 원히트 원더(One-Hit Wonder, 대중음악에서 싱글 하나만 크게 흥행한 아티스트를 가리키는 말)인 샌드 페블즈의 이 곡은 첫 챕터 ‘야유회’에서 김영호의 광기어린 슬픔을 위해 소비된다. 이미 얼큰하게 취한 듯 비틀거리며 마이크를 잡은 김영호는 누가 봐도 제정신이 아니다. 반주(飯酒)를 마시고 반주(伴奏)를 무시하며 옛사랑을 울부짖는 이 수수께끼 같은 사나이가 지금 기댈 곳이란 없다.


다~정했던 네가, 상~냥했던 네가…


70초 가까이 부여잡은 김영호의 터질 듯 서글픈 마음은 눈치없이 분위기를 뒤엎는 김정애의 ‘닐리리 맘보’ 앞에서 일거에 무너져내린다. ‘나 어떡해’는 지금은 만날 수 없는 윤순임을 생각하며 부른 노래이지만 20년 전 또 다른 야유회에서 이 노래는 김영호가 윤순임과 함께 불렀던 노래이다. 음악이 연기를 해낸 순간이다.



‘내일’ by 김수철



1987년 봄. 네 번째 챕터 ‘고백’에서 김영호는 술집 색소폰 연주에 맞춰 김수철의 ‘내일’을 부른다. 이 노래를 부르기 전 그는 운동권 학생을 물고문 했고 점심 때 짜장면을 먹으며 아내의 출산 소식을 들었다. 죽을 뻔한 사람과 갓 태어난 사람 사이에서 김영호는 자신의 ‘내일’을 본 것이다. “흘러~ 흘러~ 세월 가면 무~엇이 될~까”라는 가사는 의미심장하다. 이는 결국 1980년의 그 사건 이후 점점 괴물이 되어가는 김영호 자신에게 되묻는 말이기 때문이다.



‘Catch The Rainbow’ by Rainbow



아내의 불륜을 알고 스스로도 불륜을 저지른 김영호. 내연녀와 고기를 먹고 타고 가던 차 안에서 레인보우의 이 곡이 흐른다. 저작권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썼다는 곡의 가사는 그러나 윤순임을 그리워하는 김영호의 마음을 더할 수 없이 잘 표현하고 있어 놀랍다.


해가 지고 어둠이 내리면 그녀가 내게 올 거예요 (…) 부드럽고 따뜻하게 그녀는 내 얼굴을 어루만질 거예요 (…) 우리는 무지개를 잡을 수 있다고 믿었죠


김영호는 이 가사 내용을 알고 있었을까. 어쩌면 내연녀가 까서 입 안에 넣어준 박하사탕을 무신경하게 받아 먹으며 그 옛날 “하루에 1000개씩” 박하사탕을 쌌던 윤순임을 그는 기어이 떠올렸을지 모른다. 박하사탕은 이 장면 외에도 <박하사탕>이라는 영화 곳곳에 상징으로 박여 있다. 김영호에게 박하사탕은 윤순임의 다른 이름이다.



‘Tell Laura I Love Her’ by Ray Peterson



운동권 수배자를 잡으러 출장 간 군산에서 경아를 만난 영호. 허름한 술집에선 레이 피터슨의 노래가 흘러나온다. 감독 이창동은 이 노래를 통해 윤순임을 향한 김영호의 사랑을 넘어 아예 김영호의 죽음마저 예고한다. 자동차 경주 선수인 노래 속 주인공 토미가 사고로 죽어가며 로라에게 전하는 말은 마치 이 영화의 첫 챕터에서 김영호가 윤순임에게 전하지 못한 마지막 인사인 것만 같아 아프다. 그 자체가 한 편의 영화인 이 노래의 가사는 김영호와 윤순임이 곧 만날 것임을, 그러나 그 만남은 오래가지 못할 것임을 잔인하게 암시한다.


기다리게 해놓고 오지 않는 사람아…


잠복 근무 중에 선배 형사가 흥얼거리던 방주연의 노래 가사 역시 그렇다.



‘고향역’과 ‘막차로 떠난 여인’ by 나훈아, 하남석



다섯 번째 챕터 ‘기도’에서 김영호는 드디어 꿈에도 그리던 윤순임을 만난다. 하지만 못난 김영호는 이죽거리며 마음과 다른 행동을 해 윤순임을 돌려보내고 그날 저녁 술에 취해 고참 형사들에게 광란의 술주정을 부린다. 김영호, 윤순임의 이별과 김영호의 술주정 사이 나훈아의 ‘고향역’과 하남석의 ‘막차로 떠난 여인’이 한 형사의 장기자랑을 통해 흐른다. 두 곡은 낮에 식당에서 윤순임이 김영호에게 말한 고향 이야기와 막차(?)로 떠나버린 윤순임의 서글픈 모습을 동시에 환기시킨다. 트로트 고고라는 한국의 변종 장르가 지닌 양가감정이 첫사랑을 잡지 못해 자학하는 김영호의 서툰 마음을 우리에게 꺼내 보여준 셈이다.



‘아침이슬’ by 김민기



마지막 챕터 ‘소풍’은 첫 번째 챕터 ‘야유회’와 수미쌍관을 이룬다. 그러니까 김영호와 윤순임은 영화의 시작에서 작별하고 마지막에서 사랑을 속삭인 것이다. 이 챕터에서 야학생들의 합창으로 짧게 흐른 김민기의 ‘아침이슬’이 1979년이라는 시대 상황을 말해주는 것이었다면, 샌드 페블즈의 ‘나 어떡해’는 그 시대에 만난 커플이 맞닥뜨릴 비극의 복선이었다.


나 어떡해 너 갑자기 가버리면 / 나 어떡해 너를 잃고 살아갈까 / 나 어떡해 나를 두고 떠나가면 / 그건 안 돼 정말 안 돼 가지 말아


김영호가 끝끝내 하고 싶었던 말은 그렇게 영화의 끝에서 요란한 기차 소리와 함께 마음껏, 덧없이 울려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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