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엽 [이 한 줄의 가사]
2005년이었나. 프란츠 퍼디난드의 앨범 'You Could Have It So Much Better' 리뷰를 쓴 적이 있다. 그 아래 댓글 하나가 달렸는데, 그 댓글은 음악을 듣고 글을 쓰는 평론가로서 지금도 내가 지향하고 있는 굵직한 기준 하나가 돼주었다. 내용이란 이런 거였다. "글만 읽어도 앨범을 직접 들은 것 같다." 왜 그랬는지 참 기분이 좋았고 어떤 보람도 느꼈던 기억이다.
그때도 지금도 나는 음악을 듣고 쓰는 글, 영화를 보고 쓰는 글, 전시회를 다녀와 쓰는 글은 읽는 사람에게 그 음악을, 그 영화를, 그 전시회를 듣거나 보고 싶게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좋은 글이고 그래야 의미 있는 글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얼마 전 그런 글이 담긴 책 한 권을 만났다. 바로 이주엽의 '이 한 줄의 가사'다. 이 책은 독자가 글을 읽고 그 곡을 찾아 듣고 싶게 만든다. 이미 알던 사람에겐 한 번 더 찾아 듣게 하고, 몰랐던 사람에겐 반드시 찾아 듣게 만드는 힘이 이주엽의 글에는 있다.
저자는 프로 작사가이자 본인 스스로 'JNH뮤직'이라는 레이블 대표이기도 하다. 그는 정미조, 최백호, 말로, 박주원의 앨범들을 제작했거나 그 안에 자신의 글을 직접 가사로 심었다. 즉, '이 한 줄의 가사'는 가사를 쓰는 사람이 쓴 가사 비평서인 셈이다.
책은 크게 4부분으로 나뉜다. '노래의 운명', '그때, 우리는', '사랑은 짧고 슬픔은 길다',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까지. 이주엽은 저 노래들에 담긴 시를 이야기 하며 스스로가 시를 쓴다.(이소라의 '바람을 분다'에서 그는 "사랑은 짧은 한 시절의 허망한 오해였다"고 말한다) 가사 속 압축된 이야기에 줄거리를 덧대기도 하고 덧댄 줄거리를 철학으로 이끌기도 한다. 그는 작곡가 이영훈이 지녔던 "문학 소년처럼 여리고 순정한 영혼"으로 장필순이 노래할 때처럼 "목소리를 높이지 않고 가만가만" 써내려 간다.
한마디로 이 책은 이주엽의 사유에 기댄 인상 비평을 담았다. 비평은 그 자체가 산문시요, 굽이굽이 가사를 인용해 풀어나가는 인생사 질곡은 그것대로 또 다른 창작이다. 기자 출신인 저자의 단단한 문장들은 대개가 무겁고 엄숙하지만 또 그만큼 헐겁고 여유롭다. 이별, 고독, 공허, 침묵, 좌절, 죽음. 외로움과 그리움을 마음껏 즐길 준비가 되어 있는 존재 앞에 뿌려진 저 어두운 정서들이 되려 벅찬 자유를, 나지막한 고요와 넉넉한 평화를 주는 건 결국 노래의 힘일 것이다. 우리네 대중가요 가사를 조명한 한성우의 ‘노래의 언어’가 통계에 기반한 학자의 연구였다면, 이 책은 개인의 기억과 시대의 흔적에 물어 추억을 질겅이는 비평적 감상문이다.
당연한 얘기지만 선곡은 철저히 저자의 주관에 기반 했다.(나는 여기에 패티김의 '초우', 임희숙의 '내 하나의 사랑은 가고', 주병선의 '칠갑산'도 넣었더라면 어땠을까를 생각했다) 책에서 다룬 노래들은 대부분 70~90년대 것들로, 저자가 10~30대를 산 지점이다. 감수성이 가장 풍부했고(10대), 인생에 관해 고뇌하다(20대), 삶의 무게를 느끼기 시작하는(30대) 시기에 들은 곡들이다. 특히 글의 온도, 리뷰의 깊이에서 그가 대학생 시절이었을 80년대 중반부터 90년대 중반까지 노래들이 좀 더 많이 다뤄진 게 눈에 띈다. 누구에게나, 노래는 저 시절의 노래들일 것이다. 저자에게 그때는 "이념의 과잉과 도덕적 엄숙주의에 질식할 것 같았던, 낮에는 데모하고 밤에는 들국화를 듣던 80년대"였다.
책에선 총 41곡을 다룬다. 밥 딜런과 퀸의 곡은 시의성(밥 딜런의 노벨문학상 수상과 2018 러시아 FIFA 월드컵에서 결승에 진출한 크로아티아 대표팀) 때문에 택한 곡들로, 그것 나름의 의미도 있겠다 싶어 저자는 신문 연재의 결을 이어 책에서도 굳이 빼지 않았다. 국내 노래들은 대부분 한 뮤지션에 한 곡을 원칙 삼았지만 개중엔 저자가 편애한 한국 대중음악사 아이콘들의 것도 있다. 70년대 후반에 등장한 가요사의 전무후무 존재였던 산울림, 80년대 언더그라운드의 전설 들국화, 침착하고 침잠했던 싱어송라이터 조동진, 분노와 슬픔을 예술로 승화시킨 정태춘(과 박은옥)이 각각 두 곡씩 이 책을 물들였고, 비범한 음색을 지녔던 양희은은 아이유의 '가을아침'까지 더해 도합 세 차례 이 책에 불려온다. 그 외 책 속엔 "세상에서 가장 슬픈 목소리를 가졌던 남자" 김정호도 있고 "죽고 나서야 세상 가장 높은 곳에 오른" 유재하와 김현식도 있다.
전체 성향에서 조금은 비껴선 느낌을 주는 싸이('챔피언'), 혁오('TOMBOY')와 윤심덕의 '사의 찬미' 사이엔 무려 80년을 뛰어 넘는 시간 차가 있지만, 이주엽의 사유는 그 긴 세월 속을 떠돈 노래 가사들에 똑같이 할 말을 부여한다. 특히 최백호의 '낭만에 대하여'에서 저자는 작금 성인 가요에 대해 아래와 같은 날카로운 일갈을 던지기도 했으니, 이 책을 단순한 인상 비평서로만 볼 수 없는 이유다.
한국 대중음악에서 언제부턴가 좋은 '어른의 가사'가 사라졌다. 그동안 성인 가요는 '타락'이라 해도 할 말이 없을 만큼 미학적 퇴행을 거듭해 왔다. 교태 섞인 '꺾기' 창법을 노래 잘한다는 기준으로 정하고, 서민 음악임을 앞세워 저급한 가사 경쟁을 해왔다. 그 결과 품위와 서정이 넘치던 전통 음악의 맥이 끊어지고, 낯 뜨거운 행사용 음악이 득세했다. '낭만에 대하여'는 성인 음악이 기품을 갖추면서도 얼마든지 대중성을 얻을 수 있다는 반성적 계기를 만들었다.
스스로가 작사가이므로 저자는, 가령 밥 딜런의 'Mr. Tambourine Man' 같은 곡에선 "가사에서 멜로디의 결에 맞지 않는 생경한 관념이나, 리듬을 방해하는 음운적 결함이 있는 언어, 가수의 음색과 따로 노는 언어들은 추방된다"는 나름의 가사론을 펼치기도 한다. 또 배호의 '안개 속에 가버린 사람'에선 도입부 가사 세 소절을 조목조목 해체하면서 배호가 지닌 회한의 "낮고 굵은 바이브레이션"에 담긴 슬픔의 그늘을 논했다. 이런 그에게 결국 좋은 가사의 기준이란 '문학성'이다. 그는 이 책에서 끊임없이 '가사의 문학성'을 얘기한다. 거기에 가장 잘 어울리는 장르는 물론 통기타 포크다. 하덕규(시인과 촌장)와 김민기, 송창식과 김광석, 조동진과 박인희에서 가장 인상적인 문장들을 쏟아내던 이주엽은 조동진의 '나뭇잎 사이로'에 이르러 결국 이렇게 썼다. "조동진의 노래를 들으면 '포크 음악은 문학적 장르'라는 사실이 확연해진다."
각 곡에 관한 2페이지 남짓 가사 비평이 끝나면 그 뒤엔 곡이 수록된 앨범 리뷰가 첨부돼 있다. 리뷰는 현미경을 들이민 곡들 외 다른 좋은 곡들과 해당 뮤지션의 역사적 위치, 그 뮤지션이 즐겨 한 장르 계보의 영역까지 고루 언급하며 입체화 된다. 그 안엔 전영록이 백설희의 아들이라는 사실, '하얀나비'를 부른 김정호의 어머니가 소리꾼이었고 외조부 박동실이 판소리 명창이었다는 소소한 정보들도 있다. 하지만 이는 다 부수적인 것들이다. 이 책의 가치와 의미는 어디까지나 저자의 정제된 사유에 있다. 무심한 듯 번뜩이는 그 운치의 숲 속에서 길을 찾을 지 길을 잃을 지는 이제 책을 펼칠 여러분들의 몫으로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