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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대 Apr 18. 2020

[음반짧평] 근래 좋게 들은 몇 장들

생을 반 정도 살고 보니 대중음악 칼럼니스트로서 '들어야 할 것'과 '들을 수 있는 것'에 집중해야 한다는 생각이 계속 든다. 누구에게나 삶의 시간은 정해져 있는 것이고 때문에 내가 살아서 들을 수 있는 음악도 사실은 정해져 있다. 그런 면에서 나는 록(블루스)과 헤비메탈, (특정 시기의)팝과 포크를 파야 하는 입장이라는 걸 요즘 자주 깨닫는다. 물론 다른 장르에서도 공인된 명반들은 찾아 들으려 하는 편이지만 어쨌거나 나는 앞서 말한 장르들에 칼럼니스트로서 내 전문성을 담보해야 한다는 쪽이다. 그 좋아하는 아이언 메이든, 판테라, 매닉스, 위저, 컬렉티브 소울 전작 리뷰도 제대로 해보지 않은 내가 감히 어떤 또 다른 장르, 뮤지션들을 건들겠다고 나서려는 것인지. '들을 수 없는 것' 또는 '덜 들어도 되는 것'들을 뺀 내 취향대로 꼽은 근래 몇 장의 앨범들이다. 앞으론 이런 성향을 지켜나가며 더 단단한 전문성을 다지려 한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선 침묵하라."


아, 비트겐슈타인. 선택과 집중이 필요한 시기다.



Testament [Titans Of Creation]




테스타먼트는 1980년대에 유행한 스래쉬 메탈 밴드지만 나는 90년대 중반 이후, 그러니까 [Low]부터 테스타먼트를 더 좋아한다. 특히 97년작 [Demonic]에서 이 밴드와 연을 맺기 시작한 진 호글란의 드러밍은 이 밴드의 생명 연장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Dark Roots Of Earth]와 [Brotherhood Of The Snake]에서 갈고 부순 호글란의 육중한 그루브는 에릭 피터슨, 알렉스 스콜닉의 기타 호흡과 척 빌리의 우렁찬 포효에 맞먹는 작금 테스타먼트의 핵심 DNA다. 2008년작 [The Formation Of Damnation]부터 이번 작품까지, 대한민국 국회의원 임기와 같게 4년마다 수작을 내며 ‘4선’에 이른 테스타먼트. 지금 가장 믿고 들을 수 있는 헤비메탈 밴드는 분명 이들이다.


Pearl Jam [Gigaton]




사실 펄 잼의 디스코그래피에서 ‘버릴 앨범’은 딱히 없다. 1, 2, 3집으로 그들은 정상에 섰고 [Binaural]과 [Riot Act]로 조금 불안한 2000년대를 맞았지만 2006년작 [Pearl Jam]부터 [Backspacer]를 지나 [Lightning Bolt]까지 내리 수작을 내며 밴드는 그 불안을 이내 기우로 만들어버렸다. 심지어 대부분 졸작으로 치부한, 그래서 아예 듣지도 않고 들은 것처럼 대한 [No Code]도 따지고 보면 그렇게 못 들어줄 작품은 아니었다. [Gigaton]은 펄 잼의 1990년대 초중반과 2000년대 후반~2010년대 초반 하드록 그런지, 여기에 에디 베더의 솔로 시절 정서까지 최적으로 조화시켰다. 에디의 가사, 목소리에 담긴 지성과 매서움은 여전하고 스톤 고사드와 마이크 맥크레디의 기타도 거칠 것 없는 리프 & 솔로를 숨 고르듯 주거니 받거니 한다. 또 20년째 호흡을 맞추고 있는 제프 아멘트와 맷 카메론의 찰진 리듬 라인은 기가톤(Gigaton, TNT 10억 톤 분 폭발력 단위)이라는 앨범 제목이 품은 에너지를 그대로 닮았다. 2020년, 펄 잼이 두 번째 전성기를 맞았다.


Dua Lipa [Future Nostalgia]




그것이 인생이든 창작이든 답이 보이지 않을 때 인간은 옛것을 좇게 마련이다. 크게 되려면 한 번은 뽀개내야 하는 ‘소포모어 징크스’라는 부담 앞에 선 두아 리파도 결국 신스팝이라는 옛 장르에 자신의 현재를 물었다. 일렁이는 일렉트로닉 그루브, 그만큼 당당한 가사가 앨범 전반에 차별없이 쏟아진다. 2019년이 빌리 아일리시의 해였다면 올해는 두아 리파의 해가 될 확률이 높다. 즐거워지고 싶은가. 이 앨범을 틀면 된다.  


The Strokes [The New Abnormal]




오랜 부재로 잊고 살던 밴드가 문득 괜찮은 음반을 들고 나타났을 때, 리스너로서 가장 기분 좋은 순간 중 하나다. 2000년대를 20년이나 흘려보낸 지금 그 순간을 맛보게 해준 주인공은 바로 스트록스. 19년 전 데뷔작 [Is This It]으로 개러지록 리바이벌을 이끈 이들은 신작에서 그때 그 감각으로 80년대 팝, 글램 록, 드림팝을 뒤섞어 “디스코를 머금은 포스트 펑크”를 들려준다. 그리고 프로듀서 릭 루빈이 매만진 그 멜로디와 비트는 범작들이었던 [Angles](2011)와 [Comedown Machine](2013)의 부진을 깨끗이 씻어낸다. 일단 ‘The Adults Are Talking’부터 ‘Bad Decisions’까지 초반 네 곡만으로도 이 앨범은 승리했다. 물론 ‘At The Door’가 대표하는 그 이후 곡들 속 멜랑콜리 역시 기대해도 좋다. 줄리안 카사블랑카스와 그 친구들이 오랜만에 아주 괜찮은 앨범을 가져왔다.


장필순 [soony re:work-1]




이것은 작품의 표면적 인상, 그러니까 장필순의 과거를 정리(re:work)하는 앨범이면서 노래와 건반, 현악 파트를 뺀 거의 모든 부분에 자신의 흔적을 남긴 조동익의 앨범이기도 하다. 자연을 멀리 하다 ‘사회적 거리’를 지켜야 하는 우리네 기막힌 현실을 다독이듯 음악은 ‘기계음 속 자연음의 배설’이라는 역설적 미학을 앰비언트라는 이름 아래 천천히 뿌려낸다. 쓸쓸하다 못해 시린 장필순의 음색, 소리와 조용한 사투를 벌이는 프로듀서 조동익의 묵직한 고뇌는 감히 이 작품을 ‘우려먹기’라 쉬 단정 지을 수 없게 만든다.


차광민 [작은 소리]




자신의 내면과 타인들의 사연,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 풍경을 어쿠스틱 기타에 실어 부르는 싱어송라이터는 많다. 그래서 이 앨범도 ‘그럭저럭 들을 만 한 포크 앨범’에 머물 확률이 높은데, 그래도 ‘노을이 예쁘게 지던 날’ 같은 곡은 좀 더 귀 기울여보면 어떨까 싶다. 코로나19로 얼어붙은 지금을 생각하면 더 간절한 따뜻함이 차광민의 목소리와 멜로디엔 있다.


줄리아 하트 [FARAWAY]




줄리아 하트는 몇몇 프로젝트를 함께 이끌어온 뮤지션 정바비의 음악 놀이터다. ‘순수의 영역’이란 측면에선 가을방학의 연장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멀게는 시인과 촌장과 어떤날의 서정을, 해외로 눈을 돌려보면 스피츠나 벨 앤 세바스찬의 따스한 운치가 줄리아 하트의 음악엔 있다. 정바비의 말을 빌리면 이번 작품엔 "시작부터 마지막 1초까지 오롯이 기쁨과 따뜻함에 관"해 얘기하려는 의지가 담겨 있다. 거기엔 밴드 결성 20주년을 맞아 팬들에게 보내는 메시지 ‘난 네가 우리 집에서 제일 좋아’와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빛’이라는 역설적 부제를 가진 ‘밤산책’, 꿈에 관한 짧은 연작 ‘LUA’와 ‘PHO’, 정바비가 일본 후쿠오카 해상공원 우미노 나카미치(海の中道)와 가고시마 최남단에 있는 요론(与論) 섬을 여행하고 쓴 ‘잘못된 게 아냐’와 ‘딸린 섬’이 포함된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모던 팝록을 즐긴다면 이 앨범을 지나칠 수 없다.


박소은 [고강동]




일상의 권태가 짙게 묻은 추리닝 바지와 후드티, 지구본 위로 굴리는 장난감 비행기, 옥상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읽는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 방 안에 나뒹구는 진로 소주 세 병과 부루마블 게임. 음악은 온기 덮은 모던 포크지만 가사엔 서늘한 냉소의 한 방이 있다. 앨범의 주인 박소은은 거침없는 혼잣말로 ‘인생이 박살나던 순간’과 ‘보통의 연애’를 동시에 노래한다. 이 조용한 균열은 ‘너만 있으면’과 ‘좀 더 살아보려구요’에서 한 번 더 이뤄지고 앨범의 하이라이트 ’너는 나의 문학’과 끝 곡 ’위성에게’에 이르러 멋스럽게 봉합된다. 지독하게 유명해지고 모든 걸 다 사버리겠다는 ‘고강동’의 혈기에선 같은 계열의 싱어송라이터 강백수와 영화감독 홍상수의 작품에서 느꼈던 현실의 비린 맛도 난다. 먼저 가사를 읽자. 그 다음 음악이다. 이 앨범은 그래야만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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