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 : 옐로우 몽키

by 김성대


일본 록밴드 옐로우 몽키(The Yellow Monkey)는 1988년 결성됐다.


주요 멤버는 밴드의 거의 모든 곡과 가사를 쓰는 요시이 카즈야(보컬/기타)를 중심으로 키쿠치 히데아키(기타), 히로세 요이치(베이스), 키쿠치 에이지(드럼)까지 4인조다. 키보디스트 미쿠니 요시타카는 4집 [Smile]부터 합류했는데, 그는 앤섬(Anthem)의 드러머 혼마 히로츠구의 사촌이기도 하다.


요시이의 애칭은 로빈(Lovin). 1986년 헤비메탈 밴드 어그 폴리스(Urgh Police)에서 베이스를 쳤다. 키쿠치 히데아키는 엠마(Emma)로 불렸는데, 솔로 프로젝트 브레인차일즈(Brainchild’s) 활동과 더불어 다수 뮤지션들 서포트 멤버로 활약했다.


히세(Heesey)라는 애칭으로 불린 히로세 요이치는 2008년부터 밴드 TYO에서 베이스를 연주했고, 헤비메탈 밴드 무르바스(Murbas)에도 몸 담은 바 있다. 드러머 키쿠치 에이지는 키쿠치 히데아키의 동생으로 애칭은 아니(Annie)다. 그는 형과 함께 킬러 메이(Killer May)라는 밴드로 메이저 데뷔 했지만 89년 3월 밴드는 해산하고 만다. 에이지는 1992년, 히데아키와 함께 옐로우 몽키 드러머로 두 번째 메이저 데뷔를 했다.


초기 옐로우 몽키는 쇼크(Shock)의 마츠오 켄이치가 보컬을, 어그 폴리스 출신의 요시이가 베이스를 맡았지만 이전부터 친분이 있었던 히로세 요이치를 영입하면서 요시이는 자연스레 기타로 위치를 옮겼다. 이후 킬러 메이에 있던 키쿠치 에이지가 밴드 해체 뒤 합류하면서 옐로우 멍키는 비로소 완전체가 된다.


하지만 마츠오와 요시이의 음악적 견해차로 마츠오가 밴드를 탈퇴, 결국 요시이가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된다. 기타는 킬러 메이에서 동생 키쿠치 에이지와 함께 했던 키쿠치 히데아키가 잡는다. 1989년 12월 28일, 옐로우 몽키는 그렇게 현 멤버로 밴드의 첫 라이브를 펼쳤다.




밴드는 도쿄 시부야를 중심으로 정력적으로 활동했다. 요시이는 사브라벨스(Sabbrabells), 액션(Action) 같은 헤비메탈 밴드들에게 영향을 받았지만(요시이 뿐 아니라 멤버 모두가 헤비메탈 밴드 출신이다) 데이비드 보위나 믹 론슨, 티렉스 같은 글램록 아이콘들에게도 큰 빚을 졌던 만큼 과거엔 글램록 색이 짙은 음악을 했다. 그들은 기발한 의상과 화려한 화장을 하며 이후 비주얼계(ヴィジュアル系)로 이어질 자신들만의 색을 가감없이 드러냈다.


그러나 옐로우 몽키의 다크한 음악 성향은 그나마 있던 관중들마저 계속 떠나게 했다. 이후 한 글램록 이벤트에서 ‘Sleepless Imagination’을 발표한 뒤 관중 수는 다시 늘기 시작한다. 당시 요시이는 여장남성, 트렌스젠더를 포함한 남성 동성애자를 뜻하는 오카마(オカマ)를 자신의 정체성으로 삼았다.


밴드 이름 옐로우 몽키(약칭 ‘예몬’)는 서양인들이 동양인을 멸시하며 이르는 말이다. 팀명을 “촌스럽고 시니컬한 이름으로 짓고 싶다” 생각한 요시이가 자신의 이니셜인 ‘Y’로 시작되는 단어를 밴드 결성 전 사전에서 찾아냈다. 언젠가 롤링 스톤스 멤버들은 이 이름을 듣고 “기막힌 이름이다. 절대 잊지 못할 이름이야”라며 칭찬했다고 한다. 요시이는 한 인터뷰에서 “서양 음악에 콤플렉스가 있었다. ‘일본 록’이라는 말 자체에 이미 그것(콤플렉스)이 있는 것이다”며 “외모가 받쳐주는 장신(요시이의 키는 183센티미터다)”이 바로 옐로우 몽키의 콘셉트라고 말했다.



옐로우 몽키는 1992년 5월 21일 일본 콜럼비아사에서 싱글 ‘Romantist Taste’를 내고 메이저 데뷔 했다. 한 달 뒤 데뷔작 [The Night Snails And Plastic Boogie]를 발표했지만 판매고가 시원치 않아 앨범은 오리콘 차트에 들지 못한 건 물론 인디음악 팬들에게조차 혹평을 들었다. 8개월 뒤 두 번째 앨범 [Experience Movie]를 내놓은 밴드는 그해 4월 도쿄 메이지 신궁 외원에 있는 ‘일본청년관’에서 라이브 공연을 펼치며 조금씩 대중에게 다가갔다.


이 시기 콜럼비아의 디렉터였던 무네키요 히로유키가 “좀 더 상업적으로 가자” 밴드에 제안했고 요시이는 그전에 콘셉트 앨범을 하나 내고 싶다는 의사를 회사에 전했다. 그렇게 3집 [Jaguar Hard Pain]이 나왔다. 당시 요시이는 스스로 재규어 마냥 보이기 위해 머리를 군인처럼 밀었다. 음악과 외모가 대중의 호기심을 동시에 건드렸던 건지 3집 발표 후 공연 관객이 눈에 띄게 늘었고 이듬해 밴드는 일본 부도칸 무대에까지 선다.


공연에선 포로가 되면서 음원에는 왜 그리 인색한 거냐고!


요시이의 푸념은 소속사의 고민이기도 했다. 앨범 판매고 부진과 관련해 스태프들과 꾸준히 대화를 해온 멤버들은 “10만장으로 끝낼 것이냐, 오리콘 차트 1위까지 갈 것이냐”는 무네키요의 말에 “오리콘차트 1위”라는 결론을 내리고 과감히 음악 노선을 바꾸었다. 그 결과가 1995년 1월에 나온 싱글 ‘Love Communication’이었다.



팀과 회사가 의도한대로 ‘Love Communication’은 오리콘 싱글 차트 톱30에 들었다. 이에 탄력을 받아 2월에 나온 네 번째 앨범 [Smile]도 오리콘차트 4위에 오르면서 관계자들이 그렇게도 목말라 했던 음반 판매고에서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었다. 천천히 기지개를 펴기 시작한 밴드는 내친 김에 감행한 부도칸 공연 티켓까지 완매를 기록, 인기의 탑을 더 공고히 쌓아나갔다.


같은 해 7월, 싱글 ‘추억의 인어’가 밴드 최초 오리콘 싱글 차트 톱20에 진입하고 9월에 나온 싱글 ‘태양이 타오르고 있어’는 톱10에 올랐다. 분위기를 타고 영국에서 녹음한 5집 [Four Seasons]가 급기야 오리콘 차트 정상에 오르며 예몬은 일본의 대표 록밴드가 된다. 성공을 자축하며 진행한 투어 ‘TOUR '95 FOR SEASON’에서 밴드는 무려 9만 관중을 동원했다. 96년에 나온 아홉 번째 싱글 ‘JAM/Tactics’와 열 번째 싱글 ‘Spark’가 각각 60만장, 55만장 이상이 팔린 건 누구도 부정할 수 없었던 당시 예몬이 맞닥뜨린 눈부신 ‘현재’였다.



예몬은 96년 7월 콜럼비아를 떠나 펀 하우스(현 소니뮤직 산하 레이블 ‘아리오라 재팬’을 가리킨다)로 이적한다. 밴드를 떠나보낸 콜럼비아는 그해 12월 베스트 앨범 [TRIAD YEARS actI〜THE VERY BEST OF THE YELLOW MONKEY]를 발매해 밴드의 첫 밀리언 셀러를 만들어냈다. 예몬은 새로운 둥지에서 “1일 3곡 녹음”을 마음 먹은 6집 [Sicks]를 발매했다. 요시이와 멤버들은 최초 만들어둔 300곡을 80곡으로 줄이고, 그 중 엄선된 곡들을 최종 앨범에 실었다. “내 안에서 음악이 마구 분출 되던 때”라고 당시를 회상한 요시이는 [Sicks]가 자기 음악 인생 최고 작품이라 자찬했다. 그 시절 예몬은 어떤 싱글을 내도 45만장 이상이 팔리는 밴드가 됐다. 밴드의 유일한 오리콘 싱글 차트 1위곡인 14번째 싱글 ‘구근(球根)’이 나온 것도 바로 이 시기다. ‘구근(球根)’은 기타리스트 히데가 생전에 극찬한 곡이기도 하다.



예몬은 98년에 나온 일곱 번째 작품 [PUNCH DRUNKARD]를 자신들의 세 번째 오리콘 차트 1위 앨범으로 만들었다. 관련 투어 ‘PUNCH DRUNKARD TOUR 1998/99’는 홀 72회, 아레나 41회까지 도합 113회 공연을 치르며 굿즈, 티켓, 음반(CD) 등 무려 100억 엔(1천65억원) 이상 매출을 올렸다.


투어 뒤 새 노래 10곡을 만든 요시이는 아사모토 히로후미, 모리 토시유키, 사사지 마사노리 등 외부 프로듀서들을 영입해 “2000년도에는 싱글 위주로 발매할 것”이라는 방침을 정했다. 그는 “오래 쉬었더니 좋은 앨범을 만들 자신이 없었다. 싱글을 내면서 밴드를 정비할 생각이었다”고 당시 인터뷰를 통해 말했었다.


그러나 결국 8집 [8]은 요시이의 셀프 프로듀싱으로 세상에 나왔고 2000년 7월에 나온 싱글 ‘진주(Pearl)’를 앞세워 예몬의 마지막을 예감케 했다. 외부 프로듀서 영입을 고민하며 “자신의 곡을 다른 사람에게 맡긴다는 건 이미 끝났다는 얘기”라고 말한 요시이의 자조는 자연스레 밴드의 와해로 이어졌다. 멤버들은 저마다 활동에 집중하기 시작했고 예몬은 2004년 공식 해체되었다. 밴드가 부서지고 요시이는 요시이 로빈슨(Yoshii Lovinson)이라는 이름으로 솔로 활동을 펼쳐가다 2006년부턴 다시 ‘요시이 카즈야’로 활동 했다.



메카라 우로코(メカラ ウロコ)라는 게 있다. 예몬이 태어난 12월 28일에 “과거 옐로우 몽키로 돌아간다”는 취지로 기획된 공연이다. 1996년 12월 28일을 시작으로 98, 99, 2001, 2016, 2017, 2018년까지 총 일곱 차례 열렸다.


이 중 다섯 번째 메카라 우로코가 열린 2016년엔 예몬이 재결성 해 아홉 번째 정규작 [9999]를 내놓았다. 앨범 제목에 ‘9’가 4개인 건 이 앨범을 만들기 위해 멤버 4명이 고생(‘고생’은 일본말로 ‘쿠로(苦労)’라고 읽는다. ‘쿠로’의 ‘쿠’는 ‘9’의 일본 발음 ‘쿠’와 같다)했다는 뜻으로 붙인 것이다.


메카라 우로코는 2020년에도 열릴 예정이었지만 부도칸 내부 수리로 무산됐다. 물론 지금은 코로나19 펜데믹으로 더 힘들 일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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