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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대 Feb 24. 2021

음악을 '쓴다'는 것


*이 글은 <월간 에세이> 3월호에도 실렸습니다.


나는 대중음악 평론가를 자처해 음악을 글로 옮기는 일을 한다. 말이 쉽지, 사실 음악을 글로 옮기는 일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음악에는 소설만큼 뚜렷한 묘사도, 영화처럼 강렬한 이미지도 없다. 음악에서 묘사와 이미지는 그저 상상을 통해서만 감상자에게 온다. 하지만 반대로 읽히지 않고 보이지 않기 때문에 음악에는 소설이나 영화보다 더 많은 해석의 여지가 있다. 평론가들은 그 해석을 위한 감성과 지식, 심미안을 갖추려 저마다 노력한다. 작품 분석에 필요한 음악 이론, 일상의 독서, 사람들과 만남, 여행, 영화와 미술 감상 등이 모두 여기에 속하는 ‘노력’들이다.


음악을 쓰기 위해 평론가는 좋은 음반을 찾아 헤맨다. 아니, 찾아내야 한다. 음악평론가가 음악을 많이 들어야 하고 많은 작품을 접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예컨대 지난해 나온 밥 딜런의 39번째 정규 앨범 ‘Rough And Rowdy Ways’에 관해 쓰려 한다 치자. 이 말은 글 쓰는 사람이 밥 딜런의 기존 앨범 38장을 다 들어보았어야 한다는 말과 같다. 물론 물리적 복기를 거치지 않고도 그의 음악 세계를 꼼꼼히 파악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굳이 대량 복습에 시간을 쏟을 필요는 없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라면 ‘밥 딜런의 39번째 앨범을 쓰기 위한 38장 듣기’는 해당 음반을 논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과정이다. 이 과정을 소홀히 하면 글이 인상 비평에 기댄 단순 감상으로 흐르기 쉽고, 글 자체도 미지근하고 평면화 되기 십상이다. 한 아티스트의 현재를 이야기하려면 그 아티스트의 과거도 알아야 한다.


이제 음반을 듣는다. 한 번이 아니다. 여러 번 듣는다. 음악은 영화와 비슷해 들을 때마다 새로운 것이 들리기 때문에 한 번만 듣고 쓰면 글도 그만큼 얕아지고 얇아진다. 들을 땐 처음엔 악기별로, 두 번째엔 멜로디와 리듬에 집중하다 세 번째엔 가사를 포함한 그 모든 것들의 조화에 귀 기울인다. 나의 경우 곡 단위로 그렇게 몇 차례 듣고 나면 각 곡들에 대한 느낌을 따로 메모 해두는 편이다. 언뜻 무의미해 보이는 이 즉흥적 감상의 파편들은 나중에 행여 뒤뚱거릴지 모를 글에 은근한 버팀목이 되어 준다.


다음은 사실 조사다. 밥 딜런에 관해 내가 알고 있던 사실, 몰랐던 사실, 딜런의 이 음반과 관련한 새로운 사실들을 열심히 찾아내고 대조하고 조합해 글에 신빙성을 더한다. 시쳇말로 ‘팩트체크’에 해당할 이 과정은 모든 글의 허파라고 할 수 있는 ‘사실관계’를 분명히 하면서 글을 단단하게 조인다. 글의 또 다른 반쪽이라 할 글쓴이의 문체와 관점, 해석이 힘을 얻으려면 무엇보다 신경 써야 할 부분이 바로 이 지점이다.


이 모든 과정을 취합해 이제 나는 내가 좋게 들은 음악(음반)을 남들과 공유하기 위해 쓰기 시작한다. 작사, 작곡, 노래가 음악과 사람이 엮이는 1차 영역이라면 비평은 사람이 음악 안에 머무는 2차 영역이다. 음악은 이 비평이라는 자장 안에서 때론 비판되고 어느 면에선 상찬된다. 명작과 졸작, 범작의 기로에서 음악은 평론가와 마주해 자신의 운명을 가늠 받는다. 이는 음악의 예술적 또는 상업적 운명이 평론가의 손아귀에 있다는 얘기가 아니다. 차라리 그 칼자루는 대중이 쥐고 있는 것일지 모른다. 평론가는 그저 음악이 자신의 길을 가기 전 그 길을 묻는 대상, 음악의 궤적을 따라 그 길을 예감하거나 안내하거나 설명하는 사람일 뿐이다.


그렇게 양질의 음악을 타인과 공유하려 나는 오늘도 대중음악에 관해 쓴다. 음악이 나를 이끌고 나는 그 음악을 대중에게 데려가는 것이다. 문제는 쉽게 쓰는 것. 쉽게 쓰는 것이 가장 어렵다는 글의 역설(逆說)은 때때로 나의 글쓰기를 주눅 들게 한다. 실제 많은 대중음악 평론가들이 다른 전문가 또는 ‘고수’들의 눈치를 살피며 지금도 어딘가에서 ‘어려운 글’을 써내려 가고 있다. 되도록 남들이 덜 들었을 것 같은 음반을 골라 남들보다 더 현학적인 문장으로 그 음악을 꾸미고 과장한다. 나 역시 예외가 아니어서 ‘젠체하는 글쓰기’는 쉽게 쓰려는 나를 수시로 유혹하거나 위협한다. ‘이 정도는 써내야 평론가’라는 무모한 자존감이 고개를 들 때 내 글은 딱 그만큼 쪼그라든다.


나는 쉽게 쓰고 싶다. 창작자의 작법과 연주자의 주법, 노래 부르는 자의 창법, 소리의 질감, 편곡의 방향이 가진 의미와 의도를 읽는 이가 한 번에 이해하고 납득할 수 있는 글을 쓰고 싶다. “대중음악은 쉬워야 하고 대중과 가깝게 있어야 한다”는 신중현의 말이 되고 싶다. 대중음악 글쓰기에 대중성을 녹여내는 것이다. ‘대중음악 글쓰기’는 그래야 한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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