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ine Inch Nails [The Downward Spiral]
‘The Downward Spiral(이하 'TDS')’은 전자 음악이 록/메탈 팬들에게 건넨 진지한 초대장이었다. 초대자는 트렌트 레즈너. 그는 이미 나인 인치 네일스(이하 'NIN') 1집(1989)으로 같은 시도를 한 적이 있지만 'Head Like A Hole' 'Sin' 같은 훌륭한 싱글들을 앞세운 그것은 아쉽게도 디페시 모드의 변주에 머물면서 지구를 엎어버릴 반향까지는 일으키지 못했다.
3년 뒤 나온 미니앨범 ‘Broken’은 ‘일렉트로닉 헤비메탈’을 표현하려는 트렌트의 의지를 좀 더 구체화 시켰고, 2년 뒤 그는 마침내 자신이 그리던 구속(拘束)과 무(無)의 세계에 안착했다.
‘TDS’은 한 개인을 둘러싼 관계와 종교적 상황에 대한 의문을 인간의 해체를 통해 들여다본 ‘자살 보고서’다. ‘아래를 향한 나선’이라는 앨범 제목이 자살을 암시하고 ‘Erase’ 같은 곡이 13개 선언 같은 단문으로 죽음을 예고한 뒤 곡 ‘The Downward Spiral’에서 예고된 죽음을 마감하는 이 앨범은 한 인간의 파멸을 혼돈에 휩싸인 소리 질감으로 치밀하게 그려 나간다.
트렌트 레즈너가 이 앨범을 만들 당시 그는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던 것으로 알려졌다. 창작의 고통과 내면의 번뇌가 마련한 낭떠러지 앞에서 그에게 한 줄기 빛을 던져준 사람은 바로 데이비드 보위. 트렌트는 보위의 77년작 ‘Low’를 듣고 NIN 2집이 가야할 방향을 정했다. 물론 그 방향은 ‘Sound And Vision’ 같은 상업적 멜로디가 아닌 ‘Warszawa’부터 ‘Subterraneans’에 이르는 허무주의에 기댄 것이었다. 실제 ‘A Warm Place’의 비린 고독은 ‘Warszawa’의 염세와 지척에 있었다.
우연이었을까. 70년대 후반 음악적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아 고통받고 있었던 건 보위도 마찬가지였다. ‘베를린 3부작’ 중 첫 작품으로 알려진 ‘Low’는 한 명의 아티스트가 암울한 성찰을 통한 창작적 파멸로 내적 치유에 이른 과정이었다. 바르샤바의 암울한 분위기와 부활의 희망도 없이 죽어가던 서베를린, 그리고 보위 자신의 무기력과 강박적 방랑벽, 그로 인해 악화된 부부 관계는 역설적으로 아트 팝의 걸작을 대중에게 선물했다. 크라프트베르크와 노이!, 탠저린 드림과 존 케이지, 필립 글래스와 브라이언 이노의 세계를 흡수한 보위는 그렇게 광장공포증과 고립감, 폭력에 기반한 음악으로 “인생의 끔찍한 시기”를 뚫고 나왔다. 게리 뉴먼과 조이 디비전, 디페시 모드는 그런 보위를 의심없이 따랐고 알앤비와 아트록 대신 헤비메탈을 전자 음악에 결부시킨 트렌트는 그런 보위 후계자들의 후계자를 자처했다.
이처럼 작품 내 정서와 창작 동기 뿐 아니라 트렌트는 한 개인이 이끌어나가는 작법 상 방법론에서도 보위의 것을 따랐다.
ARP 신시사이저와 테이프 호른, 베이스-신스 스트링, 색소폰, 첼로, 기타, 펌프 베이스, 하모니카, 피아노, 퍼커션, 체임벌린, 비브라폰, 실로폰을 소화해내며 앰비언트 사운드 제조에 공을 들인 보위의 모습에서 트렌트는 경외심마저 들었는지 자기도 자신의 작품을 전면 통제할 마음을 먹었던 것으로 보인다.
트렌트는 우선 마샬 앰프에 연결해 기타와 보컬을 왜곡하는데 쓴 디지디자인(Digidesign) 사의 터보신스 프로그램과 줌9030(Zoom9030)을 구비했고 아카이 사의 샘플러(Akai S1000)와 커즈와일 사의 신시사이저(K2000)에 비트를 전달한 롤랜드 사의 TR-808, R-70 드럼 머신도 마련했다. 그리고 여기에 오버하임 신시사이저와 미니무그, 프로툴(Pro Tools)과 잭슨/깁슨 일렉트릭 기타를 더해 트렌트는 비로소 온전한 자신만의 디스토피아를 완성했다.
한 가지 차이라면 보위의 뒤에는 비록 프로듀서는 아닐지언정 ‘Low’에 물심양면 큰 도움을 준 브라이언 이노(스플린터 미니무그, ARP 신시사이저, 휴대용 모듈러 아날로그 신시사이저 E.M.I., 기타 트리트먼트, 체임벌린)가 있었던 반면, 비록 연주 참여는 ‘Closer’에서 하이햇과 ‘The Becoming’에서 신시사이저(ARP 2600)에 그쳤을 망정 트렌트와 프로듀싱을 함께 한 플러드(Flood)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Low’만큼은 아니지만 ‘TDS’의 콘셉트에 큰 영향을 준 앨범이 한 장 더 있으니 바로 프로그레시브 록 명작 콘셉트 앨범인 핑크 플로이드의 ‘The Wall’이다. 트렌트는 로저 워터스가 작품 속 깊숙이 숨겨둔 광기와 과대망상, 그리고 트랙과 트랙 사이 서사에 주목했다. 가령 ‘Don't Leave Me Now’의 절규는 그대로 NIN 2집에 섞어도 어색할 것이 없으며, ‘Another Brick In The Wall Part 3’의 인트로 역시 조지 루카스의 장편 데뷔작에서 샘플링 한 ‘Mr. Self Destruct’ 인트로에 써도 무방할 정도다.
대부분 명반들이 그렇듯 ‘TDS’도 앞선 다섯 곡이 베스트다. 킹 크림슨의 아드리안 벨류가 기타 루프를 제공한 ‘Mr. Self Destruct’는 인더스트리얼 록이라는 NIN의 장르적 지향점에 가장 적확한 사운드 지진을 일으킨다.(참고로 ‘I Do Not Want This’의 드럼 루프는 제인스 애딕션의 드러머 스테판 퍼킨스가 만들었다.) 느리고 둔탁한 ‘Piggy’는 트렌트 자신이 테스트 해둔 드럼 프레이즈를 어지러이 뿌리며 반전을 노리고, 니체의 유명한 말을 인용해 신을 부정하는 ‘Heresy’는 이기 팝의 ‘Nightclubbing’에서 심장 박동 소리를 빌려와 중층적 소리 벽돌을 쌓아나가는 ‘Closer’와 함께 앨범에서 가장 돋보이는 지점을 일구어낸다. 예컨대 ‘Big Man With A Gun’이 ‘Broken’의 ‘Last’나 ‘Happiness In Slavery’의 거친 헤비메탈 카오스에 더 가깝다면 ‘Heresy’와 ‘Closer’는 거기서 기름을 쏙 뺀 일렉트로닉의 매끈한 순수성에 더 닿아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둘을 합한 것이 바로 숨가쁜 디지털 비트와 점잖은 아날로그 피아노가 공존하는 ’March Of The Pigs’다.
‘TDS’은 다수 명반들의 또 하나 특징도 예외없이 챙겼으니 바로 ‘끝내주거나 무난한' 마지막 곡이다. 이 앨범에선 ‘Hurt’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조니 캐시가 커버해 더 유명해진 이 곡은 자살한 화자가 못다한 말들을 시린 발라드로 엮은 것이다. 아름답지만 쓸쓸한 멜로디가 현세의 비극을 내세의 구원으로 이끄는 듯, 서늘한 모래바람을 머금은 싱글은 ‘Closer’와 더불어 이 작품을 조용히 대표했다. ‘Hurt’는 낭만과 절망이 기껏해야 종이 한 장 차이라는 걸 우리에게 들려주었다.
*참고자료
<더 컴플리트 데이비드 보위> (니콜라스 페그, 그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