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성대 Sep 09. 2021

[영화 속 음악] 용서받지 못한 자

음악과 영화를 좋아한다. 지금은 음악이 더 좋아 '평론가' 씩이나 되는 직함을 달고는 있지만 나는 음악을 감상하는데 들이는 시간만큼 영화도 자주 보는 편이다. 그렇게 음악을 들을 땐 선율이 재촉하는 영상을 떠올려보고 영화를 볼 땐 그 안에 흐르는 음악의 뜻을 가늠해본다. '영화 속 음악'은 사실 영화 비평도 음악 비평도 아니다. 그저 내가 살아오며 좋게 본 영화들 속 음악의 순간을 기록하는 것이랄까. 음악의 몽타주. 이 글들은 그저 음악과 영화를 함께 좋아하는 한 애호가의 텍스트적 몸부림쯤 되겠다.


*스포일러가 있으니 되도록 영화를 본 분들만 이 글을 즐겨주시면 좋겠습니다.



<용서받지 못한 자> (윤종빈, 2005)




'비창 2악장' by Ludwig Van Beethoven



영화를 열어주는 곡이다. 고독과 인내라는 주제에서 피어난 이 낭만적 피아노 소나타는 그 아름다운 멜로디로 무언가 모를 서글픈 정서를 관객에게 넌지시 전한다. 곡 전반에 드리운 가을이라는 계절의 차분함과 나른함, 우울의 그림자가 이 작품이 비극으로 치달을 것임을 조용히 예고한다.



'Sleep The Clock Around' by Belle & Sebastian



카메라가 주인공 이승영을 처음 비춘다. 그의 귀엔 이어폰이 꽂혀 있고 거기에서 들릴 듯 말 듯 흘러나오는 음악은 벨 앤 세바스찬의 이 곡이다. 표정이 굳은 걸로 봐서 이승영은 지금 휴가를 나온 게 아닌 것 같다. 음악도 같은 생각인지 노랫말은 그의 표정만큼 우울하다.


너 자신을 봐, 넌 아무한테도 쓸모가 없어 (...)
네가 한 짓을 생각하면 분명 대가를 치르게 될 거야


영화에 이유 없이 삽입되는 음악은 없는 법. 때론 그 음악이 주인공의 심리를 대신 말해주기도 한다. 가사에 비추어볼 때 그는 부대에서 어떤 일을 저질렀고 자괴감에 몹시 괴로워하는 눈치다. 그렇다. 이승영은 휴가 중이 아니다. 탈영 중이다.



'대지의 항구' by 백년설



탈영한 이승영이 만나러 가는 사람은 친구 유태정이다. 유태정은 이등병 이승영이 자대 배치받았을 때 병장 계급으로 그곳에 있었던 인물. 둘은 중학교 동창이기도 하다. 그 유태정이 지금 지하철 1호선 안에서 단잠에 빠져 있다. 이승영이 전화를 걸었고 태정이의 전화가 울 때 튀어나오는 음악이 바로 백년설의 '대지의 항구'다. 뜬금없고 웃기기까지 한 이 벨소리는 나중에 태정이 애인과 여관방에 단 둘이 있을 때 한 번 더 울려 분위기를 깬다. 역시 승영의 전화였다.


'조선의 슈베르트'라 불린 작곡가 이재호가 쓴 '대지의 항구'는 창씨개명으로 일제의 조선인 탄압이 극에 이르렀던 1941년 3월에 발표됐다. 마음 둘 곳 없어 힘들었던 때에 조선인들이 선물처럼 느꼈을 이 곡의 신명과 희망은 태정의 위로를 갈구하는 승영의 마음에 그대로 닿아있다. 역시 영화에서 이유 없이 흐르는 곡은 없다.



'그대 내 맘에 들어오면은' / '왜 세상은' / '꿈에' by 조덕배



노량진역에서 만난 태정과 승영. 조그만 광고 회사에서 일하는 태정은 오랜만에 만나 어색한 분위기를 깨려 "너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다 얘기해. 내가 오늘 쏠 테니까." 너스레를 떨며 승영을 술집으로 데려간다. 이어 하이네켄 병맥주를 기울이며 오가는 둘의 대화 사이를 조덕배의 곡들이 채운다. 유하의 '비열한 거리'에 흘렀던 '그대 내 맘에 들어오면은'부터 조덕배 8집의 첫 곡 '왜 세상은'과 그의 대표곡 '꿈에'가 "80년대 분위기를 내며" 차분히 흐른다. 정작 할 말을 못 하고 겉도는 대화. 설상가상으로 태정의 여자 친구까지 합석해 승영은 지금 미칠 지경이다. 차라리 이런 상황에선 8집의 '왜 세상은' 다음 곡 '난 왜 여기에 혼자 있나'가 더 어울릴 것도 같다.



'페스티벌' by 엄정화



군대에서 가장 편안한 시간  하나라면 역시 음악 방송 보며 식사 집합 기다릴 때가 아닐까. 후임병 허지훈을 받은 승영의 내무실에서도 그런 시간이 있었다. 하지만 평화는 오래 가지 못했다. '말년 병장' 마수동이 몰래 TV 훔쳐본( 군대에서 신병은 선임들이 TV   전방을 바라보고 있어야 했다) 허지훈을 불러 몹쓸 짓을 했기 때문이다. 천생 부조리를 방관하지 못하는 이승영이 이를 그냥 보아 넘길  없다. 하극상이 이어졌고 마침 내무실로 들어온 태정이  사이에 중재를 선다. 하지만 비열한 마수동은 결국 유태정까지 건들며 상황을 수습 불가로 몰아간다. 승영, 태정, 수동 셋이 몸싸움을 벌이는 중에 당직 부사관이 들이닥쳤고  사람은 완전군장으로 연병장 얼차려를 섰다. TV  엄정화는 밝은 표정으로 무한 긍정을 노래했지만 TV  군대는 이처럼 절망의 생지옥이었다.



'오후만 있던 일요일' by 이병우



군대 생리에 적응하기 시작한 승영은 선임들의 부조리를 거들며 스스로도 괴물이 되어갔다.(태정은 제대 전 승영에게 "그냥 시키는 대로만 하면 돼. 그래야 편해져."라고 틈만 나면 친구에게 강조했다.) 괴물이 된 승영의 먹잇감은 당연히 직속 후임인 허지훈이었고, 어느 날 실연당한 허지훈은 감당할 수 없는 치욕을 승영과 대석(소대 '왕고')에게 맛보고 만다. 더는 기댈 곳이 없으리라 확신한 지훈. 그는 결국 자살을 결심한다. "내무실 가서 대가리 박고 있으라" 으름장을 놓은 승영을 뒤로 하고 자살할 장소로 걸어가는 지훈의 쓸쓸한 뒷모습을 카메라가 따라갈 때 나온 음악이 이병우의 '오후만 있던 일요일'이다. 이병우가 몸담았던 어떤날 전에 들국화가 먼저 들려준 무표정하고 무심한 기타 멜로디가 허무와 공허에 짓눌려 있을 지훈의 마음을 그대로 들려주는 듯하다. 허지훈은 그렇게 음악을 따라 걸어가 화장실에서 군화 줄로 목숨을 끊는다. 그리고 이 죽음은 끝내 승영의 목숨까지 심판하고 만다.



'Greensleeves' from 영국 민요



두 개의 아픈 죽음이 휩쓸고 간 자리에 태정과 승영이 겨울비를 바라보며 나누는 대화가 플래시백으로 들어선다. 영화의 끝이다. 작업 집합을 전달하러 온 죽은 허지훈의 얼굴은 잘려나갔고 둘은 제대 후 뭐하며 살지에 대해 짧게 얘기한 뒤 작업을 하러 자리를 뜬다. 영상은 페이드아웃 되고 기타로 연주한 16세기 영국 민요 'Greensleeves'가 엔딩 크레디트와 함께 올라간다. 조금만 더 서로의 말에 귀 기울였더라면, 서로의 입장에서 한 번만 더 생각했더라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 하지만 기어이 터져버리고 만 그 일이 폭풍처럼 지나가고 후회와 슬픔으로 가득한 멜로디는 상처 입은 관객을 포근하게 안아준다.  

매거진의 이전글 영화로 듣는 6070 팝 플레이리스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