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의 심상치 않은 인기는 다시 음악가 정재일의 이름을 찾게 만들었다. 그의 명성은 봉준호 감독의 두 작품 '옥자'와 '기생충'을 통해 이미 국경을 넘은 지 오래. 2018년 겨울에 작업을 의뢰받은 '오징어 게임'은 총 9개 에피소드(485분)로 무장해 정재일에게 왔다. 일단 스스로 "작곡의 시작 단계"라고 밝힌 피아노는 이번 작업에선 예외였다. 그는 드라마의 표면적 정서를 고려해 어릴 때 불고 쳤던 리코더, 소고, 캐스터네츠를 동원했고 황동혁 감독이 시작부터 염두에 뒀던 재즈 스탠더드('Fly Me To The Moon')와 하이든, 요한 슈트라우스 2세, 차이콥스키 같은 클래식 거장들의 클래식을 배치했다. 정재일은 또 자신과 결이 다른 음악을 만들어내기 위해 뮤지컬 음악감독 '23'과도 협업했다.(다른 음악인들과 콜라보는 이전부터 그가 즐겨온 작업 방식이다.) 여태껏 해온 일들의 양과 질에 반비례해 이제 겨우 불혹에 접어든 그. 신드롬에 가까운 '오징어 게임'의 글로벌 성공을 기념해 훗날 사카모토 류이치나 한스 짐머와 어깨를 나란히 할 이 개성 넘치는 영화 음악 감독의 작품 세계를 살짝 엿보는 시간을 마련했다.
정재일은 2003년작 '눈물꽃'부터 자신의 음악 세계를 가다듬기 시작했다. 긱스(Gigs)에서 베이스 치던 10대 소년 정재일을 완전히 지워버린 그 당돌한 데뷔 앨범은 앞으로의 정재일을 예고한 음악적 함성이었다. 64인조 오케스트라와 전자음악, 목소리로 자신의 첫걸음을 알린 정재일은 3년 뒤 "흔해빠지고 획일화된 한국 대중음악의 혼탁"을 빠져나오기 위해 본격적으로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당시 대중음악을 "극단적으로 하향평준화"된 것으로 여긴 정재일은 대중이 그런 자신들의 음악을 "한 번 쓰고 버리는 이쑤시개만도 못한 것"으로 취급한다고 보면서 한대수와 하림에게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고 연주하게 했다. 전제덕의 하모니카에서 김지하의 '타는 목마름으로'가 흘러나오도록 한 그때 24살 정재일은 김민기(2004년 정재일은 김민기가 쓴 전설의 노래굿 '공장의 불빛'을 자기 방식으로 복원했다)의 말마따나 "과감한 실험정신이 살아있는 새파란" 가능성이었다. 그리고 그 가능성은 우리네 전통악기를 모던의 세계로 초대한 영화 '바람(Wish)'의 사운드트랙 등을 거쳐 지금의 '오징어 게임'까지 어우르는 현실이 되었다.
2012년, 그는 노래가 없는 "공기 같은" 음악을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연극 '그을린 사랑'(드니 빌뇌브 감독의 작품으로도 유명하다)에 쓰인 'Incendies'라는 앨범을 발표한다. 솔로 앨범에서만큼은 재밌고 새로운 걸 하려는 그에게(정재일이 무용계, 대중음악계의 '혁명가'로 통하는 비요크와 피나 바우슈를 함께 좋아하는 건 우연이 아니다) 노래가 없다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지점이다. 왜냐하면 노래는 음악에 앞서 언어라는 체로 한 번 더 걸러내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만든 사람은 듣는 사람들에게 음악을 음악으로만 들려줄 수 없다. 정재일은 그러고 싶지 않은 쪽이다. 설사 말을 얹는다 해도 소리꾼 한승석과 만든 2014년작 '바리abandoned'나 2019년작 '콜라보프로젝트1. 도리안그레이의초상'에서처럼 남의 입을 빌린다. 물론 직접 나서서 노래한 솔로 데뷔작과 두 번째 솔로 앨범, 싱글 '대한이 살았다' 등 예외 사례가 없는 건 아니다. 그럼에도 경남 함양에 있는 유명한 숲에서 영감을 얻은 '상림'같은 앨범을 듣고 있노라면 역시 정재일은 음악으로만 전할 수 있는 음악이 진정한 음악이라는 농담 같은 진리를 더 믿는 쪽에 가까워 보인다. 실제 그가 쓴 연주곡들이 노래가 있는 곡들보다 진한 감동과 여운을 남기는 것만 봐도 '노래 없는 음악'은 어쩌면 뮤지션 정재일 창작론의 핵심 가치일지도 모르겠다.
그의 음악은 누가 봐도 약자의 편에 선 음악이다. 음악 앞에 강자와 약자가 있으랴만 정재일의 음악은 분명 약한 자 입장에서 더 고동치고 꿈틀댄다. 앞서 말한 한승석과의 앨범에 있는 '아마, 아마, 메로 아마(엄마, 엄마, 우리 엄마)'는 그 좋은 예다. 네팔 외국인 노동자의 눈물겨운 향수(鄕愁)와 현실적 고통이 담긴 내레이션으로 시작하는 이 곡의 현악은 감동적이되 무겁다. 그렇다. 정재일의 음악은 무겁고 고독하다. 하지만 무거운 고독이 곧 침묵을 뜻하진 않는다. 지극히 개인적이고 내면적인 정재일의 음악은 그만큼 사회적이기도 해서 사람을 괴롭히는 부조리와 부당함에는 주저 않고 물음표를 던진다. 자본주의 계급 군상을 다룬 영화 '기생충'과 456억 원 상금을 위해 벼랑 끝 채무자들이 목숨을 내거는 '오징어 게임' 뒤에 괜히 정재일의 음악이 있는 게 아니다. 그의 음악은 때론 괴기스럽게 때론 슬프고 장엄하게 울며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 사회를 관조하거나 거기에 조용히 맞선다. 냉소와 온기가 공존하는 정재일의 휴머니즘은 늘 그렇게 방관하듯 개입하는 음악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천천히 훔친다.
끝으로 장르. 정재일에게 음악 장르는 목적이 아닌 수단이다. 장르는 그에게 변주의 대상이며 해체의 전제다. 아니, 차라리 그에게 장르란 다자이 오사무의 소설 속 주인공이 자신을 규정할 때 쓴 '무(無)'일지도 모른다. 밴드에서 베이스로 펑크(Funk)를 요리할 때도, 아득하기만 했던 김민기의 세계를 탐색할 때도, 함께 군생활을 한 박효신을 도울 때도, 10센치·윤도현과 밴드 봄여름가을겨울을 추억할 때도, 요조와 패티 김을 돌아볼 때도, 판소리와 오케스트라와 재즈와 콰이어에 자신을 투신할 때도 그는 끊임없이 장르를 지우고 장르에서 도망가 또 다른 장르 주위를 서성였다. 설익은 장르를 주워 담아 농익은 자기 것으로 만들어내는 정재일의 그런 장르 편력은 사실 "새로운 것을 하려면 옛 것을 알아야 한다"는 신념에 뿌리내려 있다. 가령 일본 노가쿠 같은 옛것을 그는 되레 환상 속 초현실로 받아들이면서 섣불리 단정된 음악 장르들의 빈틈을 노리는 식이다. 정재일에게 장르는 무너졌다 쌓이고 흩어졌다 뭉치는 불멸의 무엇이다.
언젠가 정재일은 대중음악으로 번 돈을 순수음악에 쓰는 까닭으로 두 분야의 "균형 찾기"를 꼽았다. 당연히 그 많은 장르를 주섬주섬 챙기는 것도 결국 그들 사이 균형을 찾기 위함일 거다. 각 분야의 순수성을 지켜주는 일. 경계가 없는 예술. 정재일 음악은 거기에서 나온다.
*이 글은 ize에도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