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가 필요한 사람들을 위한 무대 '싱어게인 시즌 2-무명가수전'이 지난 17일 3라운드를 끝냈다. 이승환의 '어떻게 사랑이 그래요'를 선곡한 30호와 대결한 33호가 이하이의 '한숨'을 불러 올어게인을 받았고, 송골매의 ‘세상만사’를 부른 70호도 노고지리의 ‘찻잔’을 부른 73호를 제치고 4라운드에 진출했다. 압도적인 고음으로 조용필의 ‘창밖의 여자’를 씹어 삼킨 17호, SG워너비의 ‘우리의 얘기를 쓰겠소’로 먼저 세상을 떠난 멤버를 떠올리게 한 22호, 방미의 ‘나를 보러 와요’를 선곡한 삼남매(27호, 35호, 66호)에 맞서 BTS의 '다이너마이트'를 요리한 눈누난나(40호, 60호, 71호) 역시 심사위원들의 호평을 업고 나란히 4라운드 문턱을 넘었다.
그리고 한 조가 더 있다. 바로 팀 대항전에서 '위치스'란 이름으로 동방신기의 '주문-MIROTIC'을 불러 올어게인을 받은 31호와 34호의 맞대결이다. 유명 보컬 트레이너이면서 "가수가 되고 싶은 가수"라고 자신을 소개한 31호는 서태지가 2000년에 발표한 '울트라맨이야'를, "노래 좀 하는 쎈 언니"로 통하는 34호는 1995년 한영애의 네 번째 앨범에 실린 '가을 시선'을 선곡했는데 방송 전 "미리 보는 결승전"이라 예고된 만큼 두 사람의 대결은 누가 봐도 3라운드의 백미였다. 실제 두 사람의 심사 순간은 7회 방송 분당 최고 시청률(10.7%)을 찍었고, 5어게인으로 4라운드에 간 34호를 따라 31호도 마지막 추가 합격돼 자신의 무대를 연장했다. 오늘은 이 두 사람이 부른 원곡들과 그들의 해석에 관한 이야기를 좀 해보려 한다.
'울트라맨이야'는 서태지가 솔로 1집('아이들' 시절부터 치면 5집)을 내고 햇수로 2년 만인 2000년 9월 9일에 발매한 6집의 타이틀 곡이었다. 그루브, 랩에 음악적 방점을 찍은 미국 뉴 메탈 밴드 콘(Korn)과 림프 비즈킷을 표방한 이 작품은 '로커' 서태지가 가장 궁극적인 헤비 사운드를 지향했다는 점만으로도 충분히 화제가 됐다. '컴백'이라는 마케팅 전략의 시조 격인 당시 서태지의 컴백은 팬들 사이에선 하나의 사건이었고, 데뷔 때부터 장르 소매적 기질을 보여온 서태지는 이때도 록 마니아가 아닌 일반 대중에겐 생소한(어떤 면에선 충격적인) 질감의 소리를 가져와 자신의 음악 정체성을 다졌다.
서태지 6집엔 '탱크', '오렌지', '대경성', '인터넷 전쟁' 같은 쟁쟁한 곡들이 있었지만 역시 가장 큰 인기를 누린 노래는 '울트라맨이야'였다. 그건 아마 뉴 메탈의 강점과 장점을 두루 간직한 곡의 강렬한 맛도 맛이거니와 붉은색 마이크로 브레이즈(Micro Braids) 머리를 한 서태지가 드라마틱하게 등장하는 해당 곡의 뮤직비디오 때문이었을 확률도 높다. 홀로 모든 걸 다 했던 5집 때와 달리 서태지 밴드의 합주 모습이 담긴 이 뮤직비디오의 반향은 꽤 컸는데 영상은 그가 더 이상 '아이들'과 춤추는 서태지가 아닌, '연주자들'과 헤드뱅잉 하는 서태지를 강조하고 있었다. 사람들에게 '울트라맨이야'는 곧 '서태지의 성숙'과 같은 이름이었다.
하지만 데뷔곡 '난 알아요'부터 시작된 표절 시비는 6집에서도 반복됐다. 특히 '울트라맨이야'의 음악 스타일 및 퍼포먼스가 앞서 말한 콘, 림프 비즈킷과 너무 닮았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이는 한 지상파 방송 프로그램에서 직접 림프 비즈킷 멤버들을 만나 서태지의 음악을 들려주고 반응을 보는 데까지 이어졌는데, 정작 당사자들은 서태지의 개성 있는 보컬을 칭찬하면서 표절 의혹은 한풀 꺾인 바 있다. 서태지 자신도 시작부터 저들을 참고해 앨범을 만들었다고 했으니 그의 음악이 미국 뉴 메탈 밴드들과 닮은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는데, 그럼에도 의혹은 서태지를 집요하게 따라다니며 지금까지도 그와 팬들을 짜증 나게 하고 있다.
31호는 서태지의 야심작이었던 이 노래를 완전히 다르게 해석했다. 밴드 사운드로 직진하는 도입부의 강력한 바운스는 이국적인 보컬 솔로로 갈음했고, 노래 역시 원곡의 2000년대 트렌드와는 상관없는 2020년대 트렌디 알앤비 창법으로 소화시켰다. 한마디로 서태지의 팬들에겐 심심했을지 모르나 31호의 보컬 색, 성향과 성량, 실력을 아는 사람이라면 충분히 만족했을 무대였던 것이다. 일단 선곡 자체가 이색적이었고 그래서 더 기대됐던 노래였다. 물론 "탄탄한 소리 자체에 섹시함"이 있고(이선희) "이것저것 다 아는 완성형 싱어"(윤종신)인 31호는 그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34호가 부른 한영애의 '가을 시선'은 기타리스트이자 영화음악 감독인 이병우가 작곡하고 한영애가 가사를 쓴 곡이다. 한영애 작사, 이병우 작곡은 이 곡 외에도 한영애 4집의 세 곡에 더 적용된다. 그러니까 8곡이 담긴 한영애의 네 번째 음반 '불어오라 바람아'의 절반은 한영애와 이병우가 함께 쓴 것이다. 한영애는 자신이 직접 작사/곡한 노래 세 개까지 더해 이 앨범을 완전히 자기 그늘 아래 놓았는데, 나머지 한 곡은 기타리스트 이정선이 쓴 노래로 두 번째 트랙 '너의 이름'이 바로 그것이다.
흔히 한영애의 대표작은 2집 '바라본다'로 친다. 하지만 나는 '바라본다'가 한영애의 최고작일까에 대해선 물음표를 던지는 쪽이다. 분명 '바라본다'에는 그의 대표곡 '누구 없소'(물론 '누구 없소'도 한영애의 최고 곡은 아니다. 그것은 한돌이 쓴 '조율'의 몫으로 남겨둬야 한다)를 비롯해 유재하의 '비애', 이승희의 '코뿔소', 엄인호의 '루씰' 등 좋은 곡들이 많지만 그럼에도 앨범 단위에서 나는 한영애의 최고작을 4집으로 꼽는 편이다. 그의 말처럼 "세상을 보는 시선도 달라지고 감성도 달라지고 이웃을 대하는 태도 등 모든 것에 감성이 풍부하고 아름다웠던 때" 만든 네 번째 작품에는 분명 듣는 사람의 "시선과 감성, 태도"를 자극하는 무엇이 담겨 있었다. 이는 이병우를 비롯한 기타리스트 박청귀, 신윤철, 손진태의 가세와 김광민, 정원영의 건반, 그리고 베이시스트 이태윤과 강기영, 드러머 배수연과 김민기의 연주에 송홍섭의 프로듀싱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34호는 그런 한영애가 가을을 위해 뿌린 시어(詩語)들을 가장 담백한 창법으로 거두어들였다. 편곡 역시 원곡과 같게 피아노만 둔 것도 소극적이되 깊이 있는 해석을 위한 포석처럼 보였다. 즉 34호는 장르 자체를 전복한 31호와 달리 한영애의 호흡을 존중하며 그 호흡을 정복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은 것이다. 흔히 훌륭한 가수, 연주자라고 하면 자신만의 무엇을 가진 사람을 일컫는데 내 생각엔 34호가 딱 그런 싱어였다. 돌이켜보면 3라운드까지 오면서 그가 들려준 노래는 하나같이 '34호적'이었다. 그것은 해석과 소화와 표현의 삼위일체였다. '가을 시선'도 마찬가지다. 듣기엔 편해도 부르기엔 결코 녹록하지 않은 한영애를 이처럼 와닿게 불러내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는 가사를 완전히 통제했고 한영애를 완벽히 이해하고 있었다. '가을 시선'은 34호여서 가능했던 무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