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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대 Feb 10. 2022

이효리가 20년간 가요계에 남긴 유산

나는 노력했지. 단 한 순간도 기댈 수 없는 연예계란 바닥에서. 

'이발소 집 딸'에서


20년. 핑클을 떠나 이효리가 홀로 서 흐른 세월이다. 90년대 후반 S.E.S.와 인기를 양분했던 핑클의 이효리는 그러나 반쪽 이효리였다. 아니, 어쩌면 완전히 부정된 이효리였을지도 모른다. 그 시절 그는 싫어도 기획사 뜻대로 움직여야 했고 좋아하는 자신의 스타일은 접어두어야 했다.(핑클에서 'E.M.M.M' 같은 곡을 부를 순 없는 노릇이었다.) 그럼에도 핑클은 이효리에게 부와 유명세를 주었다. 미워도 미워할 수 없는 애증의 시간. 이효리에게 핑클 활동은 그런 기억으로 남았다.


'10 Minutes'를 앞세운 데뷔작은 제목 그대로 '스타일리시'한 음악을 담고 있었다. 이효리는 한 인터뷰에서 이 시기를 "어항에서 풀려난 느낌"이었다고 했다. 물 만난 물고기로 거듭난 이효리는 이때부터 노래도 옷도 방송도 자신이 하고 싶은 것만 부르고 입고 싶은 것만 입었으며 나가고 싶은 곳에만 출연했다. 하고 싶은 게 분명하지 않거나 확신이 들지 않으면 앨범 발매도 과감히 미뤘다. 뭐, 그럴 수 있는 일이고 일견 당연한 일 아닌가 싶겠지만 이때가 2003년이라는 점을 우린 기억해야 한다. 말이 '새천년'이지, 2000년대 초반 대한민국은 아이돌 출신 여성 솔로 가수의 기획과 판단에 아직은 관대하지 않았다. 할 능력이 되고 하고 싶은 의지만 있으면 무슨 일을 벌여도 문제 없을 것 같은데 이상하게 그땐 그런 뒤틀린 시선, 정서 같은 게 있었다. 그 시절 없었던 건 스마트폰 뿐만이 아니었다. 생각하는 방식에도 '스마트'가 필요했다.


2019년 12월. Z세대의 영웅 빌리 아일리시는 '빌보드 올해의 여성'에 선정된 자리에서 아리아나 그란데, 테일러 스위프트 등을 언급하며 이런 말을 했다. 


과거에 여자로서 해서는 안 되는 행동을 하신 분들 덕에 제 삶은 한결 쉬워졌다. 덕분에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었고 내가 되고 싶은 사람이 될 수 있었다.


이효리 얘길 하다 갑자기 빌리 아일리시의 말을 인용한 것에 의아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나에겐 빌리의 저 감사 인사가 마치 서인영, 선미, 효연, 화사, 가인, 씨엘이 이효리에게 보내는 인사처럼 들렸다. 얌전하고 예쁘게만 포장됐던 핑클 멤버에서 벗어나 '진짜' 자아를 찾은 "천하무적 이효리". 그런 그의 자기 주도성과 당당함은 'U-Go-Girl', 'Scandal', '미스코리아' 같은 곡으로 구체화 돼 후배 여성 가수들은 물론 '대중' 여성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쳐 어느새 문화 현상, 나아가 신드롬으로까지 번졌다.


이효리는 핑클에서 솔로 데뷔 후 "어항에서 풀려난 느낌이었다"고 말했다.


솔직히 나는 이효리가 음악적으로 가요계에 혁신적이고 획기적인 무엇을 남겼다고는 보지 않는다. 작사와 작곡에 적극 참여한 일(6집 'Black'에선 10곡 중 9곡 작사, 8곡 작곡에 참여했고 4집 때처럼 스스로 프로듀싱까지 맡았다), 그렇게 자기 앨범을 스스로 주도하려는 의지와 노력은 높이 사지만 사실 솔로 데뷔 즈음에 들려준 앨범 두 장은 이미 브리트니 스피어스나 크리스티나 아길레라 같은 해외 가수들을 통해 대중이 거의 학습한 음악이었다. 이후 트렌드를 놓치지 않고 트렌드를 응용하거나 반대로 트렌드를 비켜가며 트렌드를 이끈 탓에 '트렌드 아이콘' '트렌드 세터'라 불리긴 했어도 그것들을 무작정 '이효리표 음악'이라 부르기엔 분명 한계가 있었다. 그 한계를 힙합이라는 장르로 지우려 야심차게 준비한 4집 'H-Logic'이 한 신예 작곡가의 도덕적 해이로 만신창이가 되어버린 사건은 그래서 더 뼈아팠다. 물론 5집과 6집에서 주장보단 사색을, 채움보단 비움을 더 부각시키며 그동안 다른 요소들로 가려졌을 수 있는 이효리의 '싱어송라이터'로서 면모가 드러나고 있는 건 그나마 희망적이다. 뮤지션 이효리에 대한 평가는 7집 이후에 다시 해도 늦지 않을 일이다.


얼마전 티빙(TVING)에서 이효리의 짧은 상경기 '서울체크인'이 방영됐다. '김태호PD와 이효리의 콜라보'라는 점만으로 화제가 된 이날 방송은 '2021 MAMA(Mnet ASIAN MUSIC AWARDS)' 호스트를 맡아 서울을 찾은 이효리를 카메라가 계속 따라가는 리얼리티 콘셉트였는데, 이효리의 표현대로라면 곧 "사십사(44)살"에 접어드는 자신이 "이효리로 안 산 지 너무 오래된" 이야기였다.


'김태호X이효리' 조합만으로 화제가 된 티빙 오리지널 '서울체크인' 캡처 화면.


도착 날 서울에 딱히 머물 곳이 없었던 이효리는 호스트 리허설을 끝내고 자신의 직계(?) 선배인 엄정화의 숙소로 갔다. 거기서 독일 술 예거마이스터로 절친 언니와 오랜만에 회포를 푼 그는 다음날 MAMA 본무대를 치르고 다시 "돔 페리뇽 레이디 가가 스페셜 에디션"을 마시며(돔 페리뇽을 마실 땐 싱어송라이터 정재형도 잠깐 합류했다) 같은 집에서 두 번째 밤을 보냈다. 그리고 일정을 마친 이효리가 제주도로 돌아가는 날, 특별한 만남이 이뤄졌다. 엄정화가 연락을 돌려 서울의 한 브런치 카페에서 김완선과 보아, 화사를 만난 것이다. 모친이 싸준 김부각을 선물하고 먼저 자리를 뜬 화사를 포함해 이날 다섯 사람의 '동병상련'이 특별했던 건 자리 자체가 '1980~2020년대 한국 여성 댄스 음악'의 족적이었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모인 사람도 찍는 사람도 보는 사람도 만감이 교차했을 순간. 이는 연출자로서 김태호의 역량이 돋보이는 장면이기도 했다.


얘길 하고 보니 이효리가 엄정화네에서 계속 술만 마신 것 같은데, 아니다. 그는 아침에 일어나 보이차를 마시고 명상과 요가를 하며 내면, 신체의 평화도 다지는 반(半) 수도승이었다. 그리고 그런 그의 팔에는 문신이 두 개 있다. 하나는 브라마 비하라스(Brahma Viharas)라는 글자로 '우주의 근본'이란 뜻이다. 다른 하나는 화엄경의 '인드라망' 그림이다. 불교의 신적 존재 가운데 하나인 인드라(Indra)가 머무는 궁전 위에 끝없이 펼쳐진 그물을 뜻한다. 즉 만물과 연결돼 있는 자신이 늘 우주의 근본을 생각하며 산다는 의미다. 이효리는 엄정화의 차를 타고 가며 노자가 '도덕경'에서 얘기한 "본성대로 사는 삶"을 말했다. 그렇게 살아야 행복한 삶이 아닐까라는 얘기였다. 우주의 근본, 만물과의 소통, 본성대로 사는 삶. 어쩌면 "독설을 날려도 빛이 나고, 알면서 모른 척 하지 않는" 가수 이효리가 가요계에 남긴 유의미한 철학이란 결국 노랫말도 춤도 멜로디도 아니었을지 모른다. 중요한 건 '소통하는 자아(우주의 근본)로서 본성대로 사는 삶'이다. 그가 핑클을 벗어난 순간부터 해온 것처럼 남 눈치 보지 않고, 내가 하고 싶은대로!



*이 글은 ize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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