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나비의 두 번째 소곡집이다. 첫 번째 소곡집은 2년 전 11월에 나왔다. '규모가 작은 음악 작품'이라는 '소곡(小曲)'의 뜻이 무색하게 합창과 스트링, 밴드 사운드까지 곁들인 첫곡의 제목('가을밤에 든 생각')이 가리켰듯 그때 계절은 가을의 한복판이었다. 다섯 트랙이 자리한 그곳엔 옛사랑을 그리워하는 노래도 있었고 떠난 반려견을 추억하는 노래도 있었다. 최정훈의 말처럼 첫 번째 소곡집은 "지나간 무언가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 지난 잔나비의 음악 자장을 크게 벗어나지 않은 결과물이었다. 그 스스로는 "욕심과 집념"의 3집보다 더 잔나비스러웠던 해당 작품을 이전 어떤 앨범보다 의미있는 결과물로 여기던 터였다. 한대수의 '행복의 나라'에서 부분을 인용한 노랫말("비와 천둥의 소리 이겨 춤을 추겠네")은 그래서 어쩌면 그때 자신들의 작품에 만족한 최정훈의 기분이었을지도 모른다.
이번엔 봄이다. 두껍고 거친 연둣빛 식물 아트워크에 띄어쓰기를 무시하고 쓴 타이틀('초록을거머쥔우리는')까지 온통 그렇다. 또한 봄 하나를 위해 나머지 세 계절을 줄세운 곡 제목('여름가을겨울 봄.'), 봄이 계절 끝에 자리해 꽃 한 번 시원하게 피워낸 뒤 박수 받고 퇴장하면 좋겠다는 최정훈의 바람("봄은 마지막 계절이 되어 끝이 나야 해요") 역시 이 앨범이 어느 계절을 위해 태어났는지를 말해준다. 잔나비의 두 번째 소곡집은 탄생과 시작을 알리는 봄을 계절의 마지막에 두고 그 봄의 퇴장을 축복하는 앨범이다.
또 하나 '소곡집'이라는 특별해보이는 전제는 이번에도 영화의 맥거핀 같은 것에 머문 느낌이다. 왜냐하면 기타, 베이스, 드럼, 건반이라는 기본 밴드 편성에 스트링, 플루트, 신시사이저라는 특별 편성으로 곡들은 소곡의 어감에 어울리는 스케치 수준을 일찌감치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한적한 오후, 집에서 창밖을 바라보며 만든 이 곡들로 최정훈과 잔나비는 "산뜻하고 기분 좋은 앨범"을 만들고 싶었다고 하는데, 늘 그랬듯 저들의 바람은 느슨한듯 치밀한 편곡을 딛고 또 한 번 현실이 되었다.
첫 곡은 '레이디버드'다. "사진기를 들고 눈에 보이는 그대로를 죄다 찍어 간직하고 싶은 날의 이야기"를 담은 이 노래는 그 제목 만큼은 '작은 아씨들'을 감독한 그레타 거윅의 2018년작 동명 영화에서 가져왔다. 영화 '레이디버드'는 엄마와 함께 존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 카세트 테이프를 들으며 눈시울을 붉히거나, 앨러니스 모리세트가 'Hand In My Pocket'이란 곡을 단 10분 만에 썼다는 사실을 아빠에게 말하는 새크라멘토 10대 소녀 크리스틴 "레이디버드" 맥피어슨의 성장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다. 지겨웠던 고향과 부모님의 그늘을 떠나보니 비로소 그것들의 소중함을 깨닫게 된다는 이 걸출한 성장 영화는 잔나비의 이번 작품에 꽤 중요한 모티프가 되었다.
특히 그것은 영화 줄거리와 닮은 타이틀 곡 '초록을거머쥔우리는'의 정서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비록 3집의 '밤의 공원' 가사에서 제목을 따온 이 봄햇살 같은 노래에 최정훈은 "한강 공원에 드러누워 들 법한 한가로운 생각을 담았다"는 설명을 첨부했지만, 영화를 아는 사람들에게 이 곡은 듣는 즉시 주인공 크리스틴과 그의 단짝 친구 줄리 스테판스를 떠올리게 만든다. 처음엔 억측일 수도 있겠다 싶었지만 두 여학생의 우정을 그린 뮤직비디오를 보고 나는 두 작품의 개연성을 확신했다. 일단 뮤비에 등장하는 수영장, 교회라는 장소가 그렇고 이성과의 인연과 실연, 그를 통한 주인공의 성장 또한 그랬으며, 심지어 깁스라는 소품까지 노래는 온통 한 영화를 떠올리게 만드는 것이다. 이 청춘의 풋풋한 정서는 남은 두 곡에까지 번지며 앨범 전체를 초록으로 한껏 물들이고는 이내 잦아든다.
콘셉트 앨범을 지향한 지난 3집이 눈에 띄는 호불호를 경험한 탓인지 이번 음반에선 큰 위화감 없는 네 트랙이 그렇게 한 트랙 마냥 흘러간다. 첫 소곡집에서 어린 시절 지냈던 동네를 "나만의 유적지"('한걸음')로 표현한 최정훈만의 어휘 놀이도 "낮잠이나 한 구절 자볼까"('레이디버드'), "답을 쫓아왔는데 질문을 두고 온 거야"('슬픔이여안녕') 같은 가사로 그 맥을 이으며 팬들을 미소짓게 했다. 마치 '이번엔 그대들이 원하는 걸 들려줄게요' 속삭이듯 두 번째 소곡집의 곡들은 튀지도 처지지도 않는, 딱 적당한 평안과 낭만을 머금어 팬들 가슴을 촉촉히 적시고 가만히 마른다.
마지막으로 아트워크 얘기다. 이번 소곡집의 주제 또는 분위기를 시각적으로 압축 표현한 저 그림은 독일 북아트재단과 라이프치히도서전이 공동 운영하는 국제 책 디자인 공모전 '2021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책'에서 최고 상인 '골든 레터'를 받은 '푀유(Feuilles)'의 작가 엄유정의 작품이다. '푀유'는 화가 엄유정이 3년 동안 수목원과 식물원, 한강 일대와 제주도를 다니며 기록한 식물 그림을 담은 책으로, 프랑스어 '푀유'는 우리말로 '잎사귀'라는 뜻이다. 그의 그림이 봄을 주제로 한 잔나비 앨범의 얼굴이 된 이유다.
촉감을 통해 독자에게 작품을 경험할 수 있도록 안내하고 있다
'푀유'에 대상을 안기며 주최 측은 설명했다. 저 선정의 변이 흥미로운 건 그 말이 '봄의 촉감'을 소리로 경험할 수 있도록 안내하고 있는 잔나비의 음악을 가리키는 것처럼도 들리기 때문이다.
*이 글은 ize에도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