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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대 Apr 03. 2016

전범선과 양반들

혁명가

현실은 혁명의 적이요 혁명은 현실의 적이다. 혁명은 불륜과 달라 남들이 하는 것은 로맨스로 추앙되지만 우리가 하는 것은 죄업으로 격하된다. 혁명은 불길하고 불온하다. 뜨겁게 타오를 땐 세상을 집어삼킬 듯 날을 세우다가도 사그라질 땐 한 줌의 재로서 단박에 바스러진다. 혁명은 휘몰아치는 안개이거나 고요히 잠든 폭풍이다. 혁명은 현실적인 모순, 모순된 현실의 다른 이름이다.

1집 [사랑가]의 타이틀트랙 '설레임' PV. 이 때까지만 해도 이들의 음악은 꽤 '달콤'했다.

2년 전, 감미로운 브릿팝과 포크록 스타일로 ‘사랑가’를 불렀던 전범선과 양반들이라는 팀이 있었다. ‘새 천 년식 양반’을 자처하며 이른바 ‘양반록’을 구사했던 이들은 무슨 일인지 분노로 물든 ‘혁명가’를 들고 2년 만에 대중 앞에 다시 나타났다. 상투 튼 전범선의 서늘한 표정이 작품 사진이 되어 앨범 재킷을 장식한 것에 맞추어 이들은 살가운 어쿠스틱 기타 대신 살벌한 일렉트릭 기타를 들고 들불 같은 음들을 세상 밖으로 게워낸다.


불놀이와 도깨비, 강강술래를 앞세운 "아래로부터의 혁명"은 어쩔 수 없이 조선의 혁명 아이콘들인 전봉준과 홍경래, 장길산과 임꺽정을 대중없이 떠오르게 하는데 그 끝엔 “절망 없는 희망은 없다”던 함석헌 선생의 말에 맞장구 치듯 “사랑 없는 혁명은 없다”는 이들의 깨달음이 자리해있다. 전봉준이 전남 고부에서 동학혁명을 이끌고 120년이 지난 갑오년(2014년) 이른 봄, 전봉준의 먼 친척인 전범선이 서울에서 밴드를 결성해 ‘양반들’이라 칭하고, 다시 ‘녹두장군’ 전봉준이 군사를 일으켜 창의문을 선포한 3월 21일 밴드는 두 번째 앨범 ‘혁명가’를 내놓았다. 자고로 혁명은 씨알(민중)의 단결에서 비롯되는 법. 이 앨범 ‘혁명가’는 다름 아닌 온라인 소셜 크라우드 펀딩 플랫폼인 텀블벅(tumblbug)을 통한 149명의 후원금 즉, 6백 81만 5천원으로 ‘자금독립’을 이루어 비로소 제작에 들어갈 수 있었다.

'음악영화'라는 전제를 단 '아래로부터의 혁명' PV

앨범 ‘혁명가’는 그러나 제목처럼 무작정 세차게 몰아치진 않는다. ‘난세의 영웅’부터 그들은 ‘사랑가’를 부를 때 느낌에 다시 젖어들며 써틴 센시스(Thirteen Senses)언니네 이발관을 염탐한다. 나아가 17세기 조선 문인 서포 김만중의 <구운몽>을 직접 인용한 ‘구운몽’은 아예 노골적인 포크 팝록이다. 때문에 이들이 추구하는 “조선 로큰롤”은 ‘안개 속 뱃사공’부터 ‘강강술래’까지 이어진 뒤 몇 숨 쉬다 마지막 곡 ‘보쌈’에서 무던히 마무리 된다. 사실 조금 아쉬운 호흡인데, 나는 좀 더 거칠고 집요하게 ‘혁명’을 하드록이나 펑크로 일관되게 풀길 바랐던 것이다. 무릇 혁명이란 들키지 않도록 숨 죽인 대신 들키고서라도 서슬퍼런 것이어야 하는데, 적어도 음악적으로 전범선은 ‘양반들’을 이끌고 거기까진 가지 못한 느낌이다. 다만 이 복잡한 시국에 ‘혁명’이라는 가슴 뛰는 단어를 되새김질 할 수 있게 해준 데서 이 팀과 이 앨범은 분명 어떤 의미를 띤다.

현실이 무서워 꿈도 꾸어보지 못할 혁명을, 음악을 들으며 꿈꿀 수 있는 혁명으로 이들은 바꾸어 들려주었다. 해서 ‘아래로부터의 혁명’과 ‘불놀이야’, 그리고 ‘도깨비’가 이 앨범의 전부였다면 나는 이 앨범을 힘껏 안아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중반 이후 사그라든 소리의 주눅(이는 물론 레코딩의 질과는 별개 문제다) 때문에 나는 그저 이 앨범의 머리를 쓰다듬는 것에서 그칠 수 밖에 없다. 혁명은 이처럼 늘 미완으로 끝나야 하는 것인지, 적적한 밤 열린 하늘 위론 달빛이 휘영청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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