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성대 Aug 25. 2022

케이팝의 뿌리를 발굴한 사람들


무려 17년 만에 시리즈를 재개한 대중음악 책이 나왔다. 한국 팝의 고고학. 이 제목은 지난 2005년에 1960년대와 70년대 '한국 팝'을 파보겠다 열정을 불사른 평론가 겸 학자들이 쓴 이후 7년 가까이 잠들어있었다. 그러던 것을 10년 전부터 먼지를 털어내기 시작해 올해 다시 간판을 걸었다. 그 간판엔 '1980년대와 90년대 한국 팝 이야기'가 추가되어 있었다. 새로운 한국 대중가요의 20년 역사를 엮어내면서 이들은 내친김에 지난 20년 역사 이야기도 새 옷을 입혀 다시 냈다. 물론 그사이 출판사가 바뀌었고 저작권은 더 엄격해졌다. 17년 전 실을 수 있었던 몇몇 자료는 17년 뒤엔 쓸 수 없는 것으로 변해 있었다. 편집이 불가피했다. 그렇게 책은 전집에 가까운 압도적 분량을 자랑하며 우여곡절 끝에 4권으로 완간됐다.


먼저 제목을 좀 따져볼 필요가 있다. 케이팝이면 케이팝이지 '한국 팝'은 뭘까. 대중음악을 놓고 저 고리타분한 '고고학'이란 또 무슨 말인지. 일단 한국 팝은 말 그대로 한국에서 만들어진 팝이란 뜻이다. 저자의 말을 빌리면 팝이라는 장르가 한국과 어떤 식으로 "조우, 갈등, 교차, 중첩하는지"를 타진해보겠다는 뜻에서 고안한 조어다. 여기에 고고학을 붙였으니 결국 이 책은 한국 팝과 관련한 유적 및 유물을 발굴, 수집, 분석해 한국 대중음악의 역사를 연구, 해석하겠다는 뜻으로 보인다. 이들은 그 일을 위해 실제 음원과 기사, 사진 등 대략 1 테라바이트 이상의 자료를 취합했다고 한다. 어마어마한 분량이다.


하지만 이 책은 한국 대중음악사를 희대의 스타들과 공인된 명반들 중심으로 관찰하고 이해하려는 사람들에겐 다소 지루할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특정 스타들의 표면적인 성공담보단 그 스타를 발굴하고 만들고, 그들이 활동할 수 있는 터전을 제공한 사람들이 어디에서 무엇을 어떻게 왜 했는지에 저자들은 더 관심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즉, '한국 팝의 고고학'은 결과보다 과정에 주목한 책이며 케이팝의 잎과 줄기 이전에 뿌리가 있었다는 걸 증명하려는 책이다. 이는 BTS를 기획한 방시혁에게 "프로듀싱의 A부터 Z까지" 가르쳐준 박진영의 스승이 김형석이란 것과, 그 김형석이 영향받은 사람이 저 멀리 조동진이었다는 사실을 조망할 수 있는 책이 결국 이 책이라는 얘기도 된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 그들 사이 소통과 영향. 책의 절반은 거기에 할애되고 있다.


또 하나 장소다. 이는 고고학이라는 학문에서 유물과 더불어 발굴해야 하는 것으로 간주되는 '유적'에 조응하는 개념이다. 17년 만에 보강된 80년대와 90년대 편이 바로 이 '유적 발굴'을 적용한 지점이다. 한마디로 기존 통사 책들이 흔히 하는 방식인 연대기적 방법론 대신 장소라는 새로운 관점에서 접근해 한국 대중음악의 중심부를 파헤쳐 보겠다는 의지가 거기엔 있다. 예를 들면 방송국들이 밀집한 여의도와 조용필의 관계 같은 것, 또는 방배동과 발라드, 압구정동과 90년대 신세대 문화의 접합점이 그 의지의 소재들이다. 저자들은 그래서 아예 이 책을 '한국 팝의 지리학' 내지는 '한국 팝의 건축학'으로까지 내려했다는 농담 반 진담 반 말을 하기도 했는데(심지어 1980년대 편은 아예 부제가 '욕망의 장소'다), 책을 다 읽고 나면 그 말 뜻을 충분히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한국 팝의 고고학'은 서울이라는 거대 도시에서 거미줄처럼 얽힌 음악 산업 관계자들의 인맥과 그들이 머물거나 떠났던 지맥(地脈)을 바탕으로 "취조하듯" 40년 가요사를 추적하는 책이다.(중간중간 음악과 아티스트에 관한 깨알 같은 비평은 또 하나 읽을 거리다.) 저자들이 얼마나 집요하게 자료를 따지고 넘어갔냐면, 가령 1982년 방배동에 카페와 술집이 50개소로 빼곡하다는 신문 기사를 인용하는 틈을 타 '이가'라는 가게에서 건반 주자 최태완이 아르바이트 한 사실까지 주석으로 달 정도였다. 그러니까 너무 구체적이어서 재밌고, 그래서 한편으론 지루한 책일 수 있다는 건 이 책이 떠안은 묘한 역설이다. 정말 읽다 보면 내가 지금 대중음악 책을 읽고 있는 건지 서울 지리책을 읽고 있는 건지 헷갈릴 정도로 1500페이지를 넘나드는 80, 90년대 편은 유독 장소에 천착하며(실제 지도도 곳곳에서 활용되고 있다) 그 속에 산 사람들이 어떻게 음악을 해나갔는지를 지나치리만큼 자세히 보여준다. 디테일한 역사 맛보기라는 측면에서 그것은 거의 '접사를 통한 통사'였다.


나는 그래서 '이 책을 반드시 읽어야 한다'고는 말하지 않겠다. 그저 읽어두면 좋을 책 내지는 읽을 만한 책 정도로만 언급하고 넘어가려 한다. 그도 그럴 것이 '고고학'이라는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 이 가요 역사서는 그저 듣기에 좋아 음반(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보단 그 음반의 발매 연도, 수록된 곡명 및 순서, 참여 연주자들의 면면, 음반을 제작한 레이블과 제작자 이름까지 외우려 드는 마니아들이 더 반길 만한 내용이기 때문이다. 마치 주관적 느낌과 감성을 전시하는 에세이보단 인용과 주석에 기댄 논문에 더 가깝달까. 발굴 면에선 뒤지지 않을 학자 강준만의 유명한 시리즈 책 이름을 빌려 나에게 '한국 팝의 고고학'은 때문에 한국 대중음악의 '현대사 산책'에 가까운 무엇이기도 했다.


앞서 나는 이 시리즈가 완간됐다고 말했다. 저자들은 인터넷이 없던 아날로그 시대의 마지막 족적을 90년대까지로 보고 그 시대까지 음악을 '한국 팝'이라 부르겠다고 선언했다. 다만 읽는 것보다 보는 걸 선호하는 시대에 이런 '필사의 탐독'을 요구하는 책이 얼만큼 많은 사람들에게 닿을 지는 여전히 회의적이다. 그렇다고 책이 가진 가치에까지 그 회의론을 첨부할 생각은 없다. 지금 20~30대 대중음악 연구자, 평론가들이 나중에 2000년대와 2010년대를 정리할 때 이 방대한 자료는 틀림없이 좋은 등대가 되어주리라 믿는다. 물론 케이팝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관심이 조금만 더 부지런해진다면 그 가치는 다수의 대중에게도 그대로 전해질 것이다.



* 글은 ize에도 실렸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종이에 녹음한 플레이리스트 두 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