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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대 Sep 02. 2022

"난 이토를 죽인 이유를 발표하기 위해 이토를 죽였다"

<하얼빈> 김훈


김훈의 소설은 역사 소설일 때 '진짜'가 된다.

칼의 노래, 현의 노래, 남한산성, 흑산.

데뷔작 살무늬토기의 추억과 자전거 여행 1탄을 빼고 내가 좋아하는 김훈의 모든 작품은 그래서 역사 소설이다.

역사 소설에서 김훈의 문장은 팽팽하게 긴장하고 묘사와 대사에서도 군살이 사라진다.

김훈의 역사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갈고 썰고 말린 언어의 뼛조각을 독자로서 감당해야 한다는 말과 같다.

절제되고 정제된 그 언어는 쓰이는 것 자체로 리듬이 되어 소설을 나아가게 만든다.

관찰과 대구(對句)가 치받으며 요약되는 문장의 힘.

구어체의 활기를 꺾는 문어체 대사.

역사 소설에서 김훈의 문체는 안중근을 취조한 검찰관 미조부치의 어조처럼 늘 "건조하고 반듯"했다.


새 소설 하얼빈도 마찬가지다. 총 280페이지까지 가야 하는 소설에서 167페이지를 할애해 이토 히로부미를 세상에서 지우는 이 작품에서 김훈의 문체는 김훈의 다른 역사 소설들이 견지해온 날것의 분위기를 그대로 따른다. 예를 들면 똥 하나로 독자의 공감각을 깨우는 이런 비린 묘사처럼.

 

"이토는 서울에 처음 부임했을 때 똥냄새에 질겁을 했다. 어른과 아이들이 길바닥에서 엉덩이를 까고 앉아 똥을 누었고, 집집에서 아침마다 요강을 길바닥에 쏟았다. 장마 때는 변소가 넘쳐서 똥덩이가 떠다녔다. 똥냄새는 마을 골목마다 깊이 배어 있었고 남대문 거리, 정동 거리에도 똥 무더기가 널려 있었다. 통감부 직원들이 밤길을 돌아다니다가 똥을 밟고 미끄러졌다는 얘기를 이토는 요정에서 술 마시다가 기생들한테서 들었다 (...) 목숨의 안쪽에서 발생하는 것이므로 똥이란 당하기 어렵다......라고 이토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김훈은 안중근의 빛나는 청춘을 소설로 쓰는 일이 자신의 "고단한 청춘의 소망이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는 "게으름을 부린 것이 아니라 엄두가 나지 않아서" 소설 집필을 뭉개고 있었다고 작가의 말에서 해명(?)하고 있다.

그러던 2021년에 아픈 뒤 2022년에 회복한 작가는 안중근이라는 주제를 "더는 미루어 둘 수가 없다는 절박함이 벼락처럼" 자신을 때려 이번에 겨우 써낼 수 있었다고 밝혔다.

그건 마치 안중근의 내면에 "골병처럼 자라나고 있었던" 이토를 향한 살의와 비슷한 무엇이었다.

 

책은 시작부터 안중근과 이토 히로부미의 하얼빈까지 이동 경로부터 지도로 보여준다.

이후 소설 하얼빈은 "일본 제국 천황의 직속으로 조선 황제를 대신해서 조선을 통치한" 조선 통감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기 위한 안중근의 일주일(일대기가 아니다), 그리고 처단 후 재판과 사형까지 지체없이 밀고 나간다.

특히 작가는 제법 긴 후기와 주석을 소설 말미에 달았는데 이는 "안중근의 거사 이후 그의 직계가족과 문중의 인물들이 겪어야 했던 박해와 시련과 굴욕, 유랑과 이산과 사별에 관한 이야기"로서 불가피한 첨부였다.

거기엔 1993년 8월 21일, 공식적으로 최초였던 한국 천주교회의 안중근 추도 미사를 집전한 당시 서울 대교구장 김수환 추기경(김 추기경은 안중근의 행위는 '정당방위'였고 '국권회복을 위한 전쟁 수행'으로서 타당하다고 보아야 한다고 말했다)도 있고, 아버지의 거사를 오해와 무지로 점철된 '죄'로 인정해버린 안중근의 차남 안준생, 장녀 안현생의 어리석은 행보도 있다.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은 문명개화주의와 동양평화를 명분으로 조선을 통치하려 든 이토 히로부미의 방만한 빅피처를 찢어버렸다. 이후 법정에서 그의 진술은 에누리 없는 이 소설의 클라이맥스로 나에겐 읽혔다.


"나의 목적은 동양 평화이다. 무릇 세상에는 작은 벌레라도 자신의 생명과 재산의 안전을 도모하지 않는 것은 없다. 인간 된 자는 이것을 위해서 진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토는 통감으로 한국에 온 이래 태황제를 폐위시키고 현 황제를 자기 부하처럼 부렸다. 또 타국민을 죽이는 것을 영웅으로 알고 한국의 평화를 어지럽히고 십수만 한국 인민을 파리 죽이 듯이 죽였다. 이토, 이자는 영웅이 아니다. 기회를 기다려 없애버리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번에 하얼빈에서 기회를 얻었으므로 죽였다."


안중근은 이토를 죽인 이유를 발표하기 위해 이토를 죽였다고 말했다.

소설 하얼빈의 실체, 나아가 안중근 거사의 핵심은 바로 이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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