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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대 Nov 02. 2022

'보편적 불안'을 응시한 한국 록 음악의 현재

배드램 [Universal Anxiety]


음악가 스스로 자신의 음악에 관해 쓴 글은 듣는 쪽이 그 음악을 더 깊이, 제대로 살피게 해준다. 록 밴드 배드램의 경우 열역학 제2법칙으로 문을 연 "보편적 불안의 치하에서 남긴 몇 줄의 기록"을 통해 자신들의 두 번째 앨범을 설명하고 있는데, 정독 결과 이들의 2집은 공포와 불안을 양손에 쥐고 "무질서를 뒤로" 한 채 "생존 경주의 선두에" 나선 인류에 관한 이야기 정도로 해석된다. 여기서 인류는 한국인이라 읽어도 무방하겠다.


그러니까 이런 얘기다. 헤비한 'Love, Lies, Bleeding' 같은 곡이 대표하듯 배드램의 두 번째 앨범은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삶의 무게, 누구에게나 조금씩은 버거울 현실, 시간과 공간 또는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에서 '지금'을 바라보는 집단의 자각 정도를 다루며 그 속에 갇힌 피지배자들과 약자들의 연대를 격려하고 그들의 지각(知覺) 및 참여를 호소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밴드는 사회, 종교, 철학, 문학적 진술을 하드록과 그런지라는 포괄적 장르에 담아 열 하나의 구체적 성명(聲明)으로 풀어냈는데, 거기엔 레이지 어겐스트 더 머신의 'Born of a Broken Man' 인트로를 변주한 테마 위에 레인 스텔리 풍 허밍을 얹은 기발표곡 '정오의 시간'의 새로운 버전(Eternal Recurrence Version)도 포함돼 있다. 무릇 훌륭한 록 밴드들은 스스로 고유의 무드를 만들어내거나 존재 자체로 오라(Aura)를 자아내곤 했는데, 내 생각엔 지금 한국에선 배드램이 그런 팀이다.


물론 이들은 듣는 사람들에게 분노와 우울을 강요하진 않는다. 밴드는 그저 음악을 연주하고 소리를 외치는 자신들의 메시지에 공감하는 이들이 젖어들 수 있도록 통로를 열어두었을 뿐이다. 당연히 그 통로는 누구든 거부할 수도 또 배제할 수도 있다. 이는 "수치는 사라져 간 양심"이라는 철학적 철퇴를 AC/DC와 오디오슬레이브의 그루브에 반씩 실은 '반신'이라는 트랙에 당신이 마음을 빼앗길지 말지는 오직 당신만이 결정할 수 있다는 얘기와 같다. 언젠가 기타리스트 마이크 블룸필드가 "고통은 블루스의 기반"이라고 했듯 결국 이 음악이 목격한 세상의 고통은 당장 듣는 이들의 몫이 아닌, 팀의 중심에서 음반의 핵심을 뒤흔드는 블루스 테크니션 편지효(기타)의 몫인 셈이다.



록이 기타의 음악이라고 했을 때, 다시 그 기타의 음악에서 기타 솔로가 차지하는 비중이 록의 수준을 가늠하는 척도로 활용될 수도 있다 말할 수 있을 때 리드 기타리스트 편지효의 무게감은 남달라진다. 그는 인트로와 버스(verse), 버스와 코러스, 코러스와 코러스 사이에서 때론 블루지하게('피고'), 한편으론 현란하게('반신') 곡마다에 자기만의 주석을 단다. 배드램의 음악에서 그의 솔로는 강렬한 인장으로 한 번, 주의깊게 들은 뒤 나중에 한 번 더 들어야 할 진지한 밑줄로서 두 번 새겨진다. 터프한 'Chariot Race' 같은 곡이 좋은 예다.


그렇다고 배드램의 매력이 편지효의 구수하고 예리한 리드 기타에만 기대 있는  아니다.  밴드의 완전한 감상을 위해선 보컬리스트 이동원을 반드시 챙겨야 한다. 강력하고 을씨년스러운, 모래바람 같은 야성의 보이스 톤을 지닌 그가 싱어로서 찍어둔 방점은 사실 포리너(Foreigner) 울고  소프트  코러스와 스티비 레이 본도  기울일 쨍쨍한 블루스 릭이 정면으로 맞서는 '피고'보단 탁한 샤우팅과 기타 속주가 치받는 'Rusted'에서 찾아내기가  수월하다. 이는 마치 연꽃을 뜻하는 'Lotus' 시적 가사를 삼켰다 이미지로 토해놓은 , 인공지능(AI) 프로그램 미드저니(Midjourney) 활용한 재킷 아트워크의 이국적 광활함을 사람의 목소리로 듣는 느낌에 가깝다. 배드램의 이동원은 사운드가든의 크리스 코넬이요, 스톤 템플 파일럿츠의 스캇 웨일랜드다. 그가 없으면 배드램도 없다는 뜻이다.


그런 두 사람이 제 몫을 다할 수 있었던 건 또 베이스와 드럼이 있기 때문이다. 기타의 유니즌 벤딩이 파편처럼 점멸하는 '모란'을 주도한 김소연의 둔중한 사색은 '반신'의 후반부에서 재연된 뒤 'Lotus'에서 자유를 얻어 연주곡 'Chariot Race'에서 더욱 존재감을 갖는다. 김소연의 플레이는 흔히 베이스라는 악기가 지닌 것으로 간주되는 보편적 특징, 즉 '있을 땐 잘 몰라도 없으면 눈에 확 띄는' 연주의 전형처럼 들린다. 감동적인 엔딩곡 'Days of Being Wild' 마냥, 특히 공간감이 중요한 배드램의 음악에서 김소연의 역할은 사소할 수 없다. 이런 김소연의 리듬 파트너인 드러머 최주성은 느긋하게 곡과 함께 거닐다가도 일순 바람 같은 프레이즈를 일군 뒤 어느새 브레이크를 걸어 그 바람을 먼지 하나까지 거두어들이며 곡에 입체감을 더한다. 그는 정직한 4/4박보단 휘청거리는 5/4박을, 맑은 정박보단 느슨한 폴리&셰이크 리듬을 더 선호하는 듯한 느낌을 앨범이 흐르는 내내 받게 한다. 생동감과 긴장감이라는 배드램 음악의 조건에서 최주성의 영역은 결코 좁지 않다.


어느 영화 평론가의 말처럼 영화감독은 관객의 상상력이라는 현악기를 연주한다. 비슷한 맥락에서 뮤지션은 현악기와 타악기를 연주해 리스너의 상상력을 영화로 만들어낸다. 배드램은 그 영화가 바로 우리의 현실이라는 걸 이번 앨범으로 깨닫게 해주었다.



*이 글은 <마이데일리>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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