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성대 Nov 03. 2022

위로가 필요한 지금이야말로 음악이 가장 필요할 때


이태원 참사 충격과 슬픔을  가누기도 전에 대중음악계는  다른 힘든 상황과 마주해야 했다. 바로 음반 발매 연기  행사/공연의 잇따른 취소다. 돌이켜보면  그랬다. 인재든 천재(天災) 재난이 일어나면 생업의 포기, 존재의 위축은 항상 문화 예술인들의 몫이었던 . 특히 대중음악인들에게  압박은  철저했다.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다, 일단 멈춰라, 나중에 해라.  사회는 프로 뮤지션들의 생계형 공연과 앨범 발표를 취소 또는 연기시키는 일을 마치 재난  매뉴얼처럼 작동시켰다. 일반 회사원들의 출근을 막거나 자영업자들의 영업을 금지시키고, 공장 가동을 멈추게 하지는 않으면서 유독 대중음악인들의 '생업'에는 제동부터 걸고 봤던 것이다.  그럴까.


물론 어떤 분위기에서 어떤 마음으로 그랬는지 짐작은 간다(정부는 이태원 사고와 관련해 2010년 천안함 피격 사건 이후 두 번째 '국가애도기간'을 선포했다). 지금은 그렇게 하는 것이 사회 정서에 맞는 듯싶고 또 그것이 희생자 애도 차원에서 도리일 것 같아 했을 조치였으리라. 문제는 그 조치를 통보받은 사람들의 자발성 유무다. 가령 아티스트가 이번 일에 큰 슬픔을 느껴 스스로 공연 일정을 취소하고 앨범 발매를 미루는 건 문제가 안 된다. 그건 그 사람의 자유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각자의 방식(앨범 발매나 공연 등)으로 희생자들을 애도하려는 의지를 사회 또는 나라 차원에서 통제 및 눈치 보게 하는 건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따르는 곳에선 다시 생각해봐야 할 일이다. 무엇보다 이들에겐 그 일이 먹고사는 문제와 직결되는 생업이기에 더 그렇다. 개인의 감정을 집단이 통제하고 그 감정을 특정 방향으로 강제하는 분위기가 사회 보편적 분위기가 될 때 어떤 일이 벌어질 수 있는지 우린 역사를 통해 충분히 학습한 터. 지금 뮤지션들은 그저 자신의 일(음악)로 격해진 감정을 추스르고 싶을 뿐이다.


결국 이 모든 건 음악에 대한 대중의 편견 때문인 것 같다. 즉 여유롭고 팔자 좋은 이들이 기분 전환용으로 즐기거나, 답답한 일상의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흥청망청 웃고 떠드는 데 배경으로 쓰이는 예술적 기재 정도로 사람들은 음악을 이해하는 것이다. 때문에 엄숙히 애도해야 할 상황에서 그런 음악적 행위는 금기의 영역으로서 자연스레 뒷전으로 밀린다. 맞다. 음악은 그럴 때도 쓰인다. 커피 한 잔과 감상하며 마음의 평화를 찾고, 노래방에서 소리 질러 근심도 날린다. 하지만 그건 오락과 여흥이라는 음악이 가진 지극히 일면일 뿐이다. 사실 음악은 그보다 더 다양한 얼굴로 우리의 일상, 나아가 삶을 대한다. 예컨대 이번에 콘서트를 취소한 장윤정은 '어머나' 대신 '바람길'을, 마찬가지로 공연을 포기한 영탁은 '막걸리 한 잔'이 아닌 '달이 되어'를 부르며 예정대로 관객들과 조용히 애도의 시간을 가질 수도 있었을 거란 얘기다. 음악은 그렇게 칼로 무 베듯 나누어 단정 지을 수 있는 흑과 백이 아니다.


러시아와 전쟁 중인 우크라이나의 록 밴드 오케안 엘지의 싱어송라이터 스뱌토슬라프 바카르추크가 자국 군인들과 국민들을 위로하기 위해 노래를 부르고 있다. 사진출처=뉴스 영상화면 캡처

그래도 그건 아니라는 말이 어디선가 들리는 것 같다. 그럼 이건 어떨까. 여전히 음악을 유흥과 여가의 재료로만 인식하는 사람들에게 묻는다. 러시아와 전쟁 중인 우크라이나의 록 밴드 오케안 엘지(Okean Elzy)의 싱어송라이터 스뱌토슬라프 바카르추크가 자국 군인들과 병원 환자들을 위해 노래를 부른 것에도 당신들은 같은 잣대를 들이밀 텐가. 또 4년 전 영국 맨체스터에서 열린 아리아나 그란데 콘서트 현장에서 영국 폭탄 테러 1주기(2017년 5월 22일 영국 맨체스터 경기장에서 아리아나 그란데 3집 투어 공연이 끝난 뒤 매표소 근처에서 폭탄이 터진 사건)를 맞아 수많은 군중이 22명 희생자들을 추모하며 오아시스의 'Don't Look Back In Anger'를 합창한 일은 어떤가. 심지어 그날 알버트 광장에선 경찰과 시민들이 어깨동무를 하고 비틀스의 'All You Need Is Love'를 목이 터져라 불렀다. 과연 이 사람들이 즐거워서 그랬을까. 우린 대중음악이 무작정 즐기기만 위한 것이리라는 편견과 더불어 애도와 추모를 무조건 조용히, 숨죽여해야만 한다는 강박에서도 벗어날 필요가 있다. 애도의 마음은 하나이되 그 방식은 열려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음악은 음악인들의 생업이다. 당연히 그들도 다른 사람들처럼 생업에 종사하며 재난의 희생자들을 애도할 권리가 있다. 그리고 음악은 무조건 웃고 떠드는 예술도 아니다. 나름의 격이 있고 스타일이 있으며, 스스로가 언제 어떤 식으로 등장하고 울려야 할지 다른 어떤 예술장르보다 분위기 파악도 할 줄 아는 예술이다. 이런 일이 있었다. 그룹 룰라 시절 표절 의혹과 사업 실패로 10년 간 슬럼프를 겪은 이상민은 한때 스스로 '나는 사람이 아니었구나' 생각했다고 한다. 심리적 고통에 살아갈 의지마저 꺾였을 때쯤 그를 일으켜 세워준 건 다름 아닌 루시드폴의 '사람이었네'라는 노래였다. 음악은 그런 것이다. 누군가 슬프고 힘들 때 눈치 없이 흥에만 겨워하지 않고 그 슬픔과 고통을 보듬어 준다. 실제 음악은 그럴 때 가장 큰 힘을 발휘해왔다. 굶주림에 허덕이는 아프리카를 돕고자 기획한 앨범 'We Are The World'도, 난치병에 대한 인류의 경각심을 갖게 하기 위해 마련했던 프레디 머큐리 추모 콘서트도, 2011년 3월 11일 발생한 동일본 대지진의 사상자들을 추모/위로하기 위해 만든 기획 앨범 'Songs For Japan'도 똑같이 음악의 의미와 가치를 보여준 소중한 사례들이다. 부디 이번 일을 계기로 보다 상식적이고 단단한 사회안전망 구축(構築)은 물론 음악에 대한 대중의 오해와 편견의 구축(驅逐)도 함께 이뤄지길 조심스레 바라본다.



*이 글은 ize에도 실렸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보편적 불안'을 응시한 한국 록 음악의 현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