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듣는 "소음의 정원"
우리의 목표는 '해외의 마이너한 록밴드 사운드'였는데, '해외 메이저 사운드는 나올 리가 만무하다'는 전제하에 마이너 혹은 인디 레이블의 록밴드, 또는 유명 밴드의 초기 앨범 사운드 정도를 목표로 삼았다." - 윤병주
노이즈가든의 가치는 그 느리고 무거운 소리로 60년대 싸이키델릭과 70년대 하드록, 80년대 헤비메탈과 90년대 얼터너티브록을 모두 녹여냈다는 점일 것이다. 역사에서 가정은 무력한 것이지만 만약 밴드 결성의 계기이자 전제였던 사운드가든(Soundgarden)이나 『Dirt』라는 앨범으로 일찌감치 '싸이키 헤비니스'의 일막을 정리한 앨리스 인 체인스(Alice In Chains) 같은 밴드가 없었다면 노이즈가든의 이러한 업적은 국경을 초월해 회자될 영역이었을지도 모른다. 여러 의미에서 '충격'과 '만족'의 결과물이었던 그들의 데뷔 앨범. 희소하고 희귀해 비교적 고가에 거래되던 그것이 한 팬의 도움으로 18년이 지나 재발매 되었다는 사실은 그래서 국산 헤비니스의 가장 중요한 발자취를 다시 더듬는 과정이자 결과로서 매김 하였다.
리마스터링과 리패키지를 거친 재발매반의 특징은 '또렷함'이다. 그것은 포복과 부유를 넘나드는 소리의 질감이 보다 분명해졌단 뜻인 동시에 구체적인 회상, 곡 설명을 곁들인 이석원(언니네이발관)과 윤병주의 라이너노트 즉, 진위의 해명이란 측면에서 또렷함이기도 하다. 나는 둘 중 윤병주의 설명과 고백들이 좀 더 흥미로웠는데 가령 한 곡이었던 「나는 기다려」를 따로 떼어 수록한 이유가 「기다려」의 시작이 메인리프의 시작과 맞물리게 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는 사실, 「동정」과 「묻지 말아줘」 사이 긴 피드백이 슬레이어(Slayer)의 『South of Heaven』 접속곡 「South of Heaven」과 「Silent Scream」의 오마주였다는 사실, 그리고 「Evitagen」이라는 히든 트랙을 프린트 공장에서 "후반부 불량으로 판단"해 초판에는 실리지 못했다는 사실 등이 그랬다.
밴드의 정신적 지주가 레드 제플린(Led Zeppelin)과 블랙 사바스(Black Sabbath)라는 사실이야 그들의 음악을 주의 깊게 들은 사람이라면 단박에 눈치 챌 특징이요 단서일 터. 나는 차라리 이번 음반에서 페이즈(Phase) 이펙트와 오버드라이브, 딜레이와 피드백을 통해 확보했을 독보적인 톤과 연주 스타일을 가진 윤병주의 기타보단 새삼 박건의 보컬에 좀 더 집중했다. 그의 목소리는 마치 근엄한 댄직(Glenn Danzig)과 몽환의 레인 스텔리(Layne Staley), 격정의 크리스 코넬(Chris Cornell)을 합쳐놓은 듯 들렸는데 하물며 「말해봐」의 마지막 샤우팅에선 「Fucking Hostile」을 부른 필립 안젤모(Phillip Anselmo)의 살기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잘 생기고 덩치 큰 서양 로커가 한국어로 노래를 부르고 있는 듯한 착각이랄까. 그만큼 박건의 목소리는 빌 워드(Bill Ward)보다 코지 파웰(Cozy Powell)에 좀 더 가까웠던 박경원의 드러밍과 더불어 당시 이미 '글로벌' 냄새를 적잖이 풍기고 있었던 것이다.
"공격적이고 무게로 짓누르는 외적인 부분은 많이 누그러졌지만 내적으로는 훨씬 깊어진 음악, 여러 번 들을수록 더 매력적인 음악을 만들고자 했다. 사운드 면에서도 엄청난 하이게인 톤보다는 수수한 빈티지 느낌의 톤을 추구했고 보컬 역시 일관적으로 내지르는 것보다는 완급과 강약을 조절하도록 했다." - 윤병주
하지만, 그럼에도 난 이번 재발매반에서 윤병주 자신이 마지막(앨범 제목은 'Last but not least'라는 관용어에서 따온 것이다.)이라 생각하고 만든 노이즈가든의 두 번째 앨범에 좀 더 귀가 갔다. 아니, 어쩌면 재발매를 통해 재발견을 했다면 더 맞는 말일지 모르겠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작곡 면에서나 연주 면에서나 사운드 면에서나 구성 면에서나 2집이 1집에 평가 상 밀릴 이유는 전혀 없어 보인다는 게 내 진심이다. 앞서 언급한 팀들 외 컬트(The Cult)와 캐서드럴(Cathedral), 존 존(John Zorn)까지 노이즈가든의 레퍼런스에 포함시키는 윤병주의 음악적 욕심은 분명 그 두 번째 앨범에서 더 입체감을 띠었기 때문이다.
팜뮤팅과 미디엄 템포로 헤비하게 길들인 「더 이상 원하지 않아」는 누가 들어도 1집의 연장선이지만 「쇼생크탈출」은 가사도 리프도 좀 더 "모던"에 가까웠다. 그러나 「미련」과 「8월」의 "노이즈가든 스타일"에 정차식의 광기를 얹은 「다시 어둠이」는 다이아몬드 헤드(Diamond Head)를 커버한 메탈리카(Metallica, 「Helpless」)를 꼬리에 붙이며 그 모더니즘에 찬물을 끼얹는다. 이 찬물은 반복되는데, 가령 전작의 「우주 꽃사슴」에서 자체 체험했던 앰비언트 색을 좀 더 구체화시킨 「인생의 리세트 버튼」과 레드 제플린이 연주한 「Back in Black」 같은 「여명의 시간」은 "빈티지와 하이게인(High Gain)" 사이에 있던 윤병주의 고민이 가장 극적으로 드러난 부분이며, 일렉트로니카 드럼과 하드록 기타가 만난 「미로」와 페이드인하면서 접근해 침착하게 진행되다 이내 톤을 으깨며 모든 파트가 치솟는 「또 다른 유혹」의 사이엔 "헤비 리스너" 윤병주의 어지러운 장르적 취향이 녹아있다. 두 갈래로 나뉜 「향수 I, II」에서도 마찬가지, 처음엔 블랙 사바스라는 뿌리로 돌아가나 싶더니 두 번째 파트에선 제인스 에딕션(Jane’s Addiction)처럼 돌변하며 "들을수록 더 매력적인" 여지를 윤병주(와 밴드)는 만들고 있다. 이처럼, 적어도 "깊이"라는 측면에서 노이즈가든의 “마지막”은 「나는」으로 문을 연 영광의 첫 발에 하등 뒤질 것 없는 수준이었다는 걸 우린 기억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마지막 세 번째 시디는 커버곡과 데모, 그리고 라이브의 혼재다. 1997년 국내 록팬들 사이에서 제법 화제가 됐던 메탈리카 트리뷰트작 『Am I Metallica』 수록곡 「Ride the Lightning」과 2년 뒤 『Indie Power』라는 컴필레이션 앨범에 실은 윤수일의 「제2의 고향」 커버는 민성기(트랜지스터헤드)의 전자음악 성향으로 판을 짠 「혹성탈출」을 사이에 두고 각각 자리했다. "예상을 뒤엎는 미친 카피"와 "한 음 한 음 정확한 카피" 사이에 놓인 "멋있는 리믹스"는 다시 봐도 꽤 그럴 듯한 배치다. '네거티브'한 블랙 사바스의 「Black Sabbath」를 창조적으로 계승한 「Negative」, 「Heartbreaker」와 「Black Dog」 정도를 떠올리게 하는 지미 페이지(Jimmy Page) 표방곡 「Into the Ground」, 데뷔작에서 「타협의 비」로 승화된 「Rain of Compromise」, 그리고 김기현의 베이스가 주도하는 베이시스트의 곡 「Dizzy Sunshine」까지. 초기 데모 음원 네 곡을 들으며 든 생각은 헤어 메탈에 좀 더 어울릴 정재준 자리에 박건이 들어온 건 정말 다행스런 일이었겠단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박건이란 출중한 보컬리스트가 없었다면 그 무겁고 화려한 윤병주의 기타도 어쩌면 빛을 바랬을지 모른다. 생각만 해도 아찔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