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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대 Jul 11. 2024

'K-POP의 아버지' 이수만의 넥스트 레벨


SM 변화가 심한 음악시장에서 한국 음악 산업을 지속 성장 가능한 산업군으로 진화시킨 입지전적인 기업이다. 현재의 케이팝이  세계로 나아갈  있는 토대를 만들고,  세계인들에게 새로운 장르로서 케이팝을 제시한 SM 이뤄낸 모든 업적의 중심에는 ‘케이팝의 개척자이수만  총괄 프로듀서가 존재했다. 현재 케이팝에 종사하는 모든 이들이 이수만  총괄 프로듀서의 영향을 받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수만  총괄 프로듀서는 척박했던 대한민국 대중음악을 산업화시키고, 세계의 으뜸으로 우뚝 서게  우리 음악인들의 레거시다


위 글은 2023년 2월 7일 카카오가 SM의 지분 9.05%를 확보하고 3일 뒤 하이브가 1대 주주였던 이수만 SM 전 총괄프로듀서의 주식 14.8%를 인수하는 계약을 맺고서 발표한 ‘이수만과 하이브, SM엔터테인먼트 미래를 위한 공동 성명서’ 내용 중 일부를 정리한 것이다. 이후 1년여간 진행된 카카오의 SM 인수 과정은 여기선 논외다. 중요한 건 이수만과 SM이 “해외 시장을 개척한 케이팝의 개척자”였다는 사실이고, 지금 케이팝 업계에 종사하는 모든 이들이 “이수만의 영향을 받은” 일이다. 방시혁은 당시 덧붙이길 “세계 대중음악의 게임 체인저로 도약”하기 위해” 하이브와 SM이 손을 맞잡았다며, “케이팝 글로벌 경쟁력의 극대화와 미래 사업을 위한 라이프 스타일 플랫폼 기업”이라는 공동 비전 달성을 강조했다. BTS를 통해 업계 원톱이 된 하이브의 수장이 SM의 과거 수장에게 바친 저 노골적인 상찬은 왜 세상이 이수만을 ‘케이팝의 아버지’라고 부르는지에 대한 단호한 사실 정리였다.     


이수만이 케이팝 ‘태초의 빛’을 본 건 1983년 미국 유학에서였다. 컴퓨터 엔지니어링으로 석사학위를 받은 그가 머물던 당시 미국에선 MTV가 기지개를 켜고 있었다. 1981년 8월 1일 자정 직후 영국 뉴웨이브 밴드 버글스의 ‘Video Killed the Radio Star’ 뮤직비디오로 ‘보는 음악’의 시대를 알린 MTV를 대하며 이수만은 댄스, 블랙 뮤직, 컴퓨터음악이 미래 음악의 대세가 되리라 직감했다. 그렇게 귀국 후 인천 월미도에 ‘헤밍웨이’라는 커피숍을 차려 목돈을 마련한 이수만은 89년 SM엔터테인먼트의 전신인 SM기획을 세워 6년 전 MTV에서 얻은 영감을 한국 음악 시장에 응용해 보기로 마음먹는다. 자본금 5천만 원에 기댄 케이팝의 소소한 출발이었다.     



1971년부터 80년대까지 간헐적이나마 스스로 음악을 했고, 77년 제1회 대학가요제 MC를 맡으며 MC계에서도 두각을 보인 그가 정작 해보고 싶었던 건 프로듀서였다. 이수만은 한 인터뷰에서 “70년대는 가수 자신이 직접 뛰어 스타가 됐고 80년대는 매니저의 시대였으며, 90년대는 프로듀싱의 시대”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러면서 신승훈과 김건모, 노이즈를 배출한 라인음향과 SM이 90년대 프로듀서 시대의 두 기둥이었다고 자평했다. 즉 라인음향의 김창환이 90년대 유로 팝 스타일을 내세웠다면 자신은 알앤비와 힙합 계보를 이끌었다는 것이다. 이수만은 2021년 2월 1일 tvN ‘월간 커넥트’에 출연해 미국 유력 주간지 ‘버라이어티’가 2017년 이후 세계 미디어 산업을 이끄는 리더 500명을 선정 발표해 온 ‘버라이어티 500’에 4년 연속 들었다는 사실에 기뻐하며, 미국의 대형 레이블인 캐피톨에서 자신의 프로듀싱 능력에 러브콜을 보내온 사실을 따로 뿌듯해했다. 또 최근 한 포럼에선 “한국은 프로듀서의 나라가 돼야 한다”고까지 밝힌 그다. 이수만은 SM을 구상한 단계부터 이끌어온 과정, 그리고 SM을 떠나던 그 순간까지 프로듀서로 남고 싶었다.     


그런 ‘프로듀서 이수만’이 기획한 1호 가수가 바로 현진영이었다. 현진영은 이수만이 MTV에서 얻은 모든 것(현진영은 노래도 잘하고 춤도 잘 추고 비주얼도 됐다)을 그려볼 수 있는 탁월한 캔버스였지만 사생활을 통제 못해 SM 역사에서 조금은 얼룩진 존재로 남고 만다. 멀리 가려면 스타의 사생활도 관리해야 한다는 교훈을 얻은 이수만은 예의 철저한 사전준비와 조사를 이어갔다. 그는 “리서치를 충분히 하면 무엇이 돈이 되는 상품인지 알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늘 미디어를 주시했다. 그리고 1995년에 그의 눈에 띈 기사들은 대부분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상품이 뜬다’는 내용이었다. 청소년을 타깃으로 한 음악은 당시 세계적인 추세이기도 했고, 그 추세는 2024년인 지금도 유효하다. 1996년 9월, 1세대 보이밴드 H.O.T.가 그렇게 탄생했다. 서태지와 아이들의 은퇴와 공백을 자신들의 발판으로 삼은 H.O.T.는 2000년 베이징 단독 콘서트에서 1만 명 이상 관객을 동원하며 케이팝의 글로벌 진출 가능성을 최초로 증명했다. 당시 중국에서 H.O.T.는 생각보다 대단했는데, 무려 마이클 잭슨과 리키 마틴까지 제치고 외국가수로선 상상할 수 있는 최고 인기를 누렸다. 이수만과 SM은 이후 S.E.S.라는 1세대 걸그룹을 비롯해 최근 뉴진스 도쿄돔 공연으로 화제가 된 일본 시장을 본격 열어젖힌 보아, 동방신기에 이어 소녀시대, 에프엑스, 샤이니, 엑소를 내리 배출하며 향후 글로벌 대중음악계의 현상이 될 케이팝 아이돌의 원형을 제시했다. 과거 이수만이 뉴 키즈 온 더 블록 내한공연을 보며 ‘우리 가수가 외국에 가서 저런 인기를 얻을 수는 없을까’를 고민하고 ‘컬처 퍼스트, 이코노미 넥스트’를 밀어붙인 끝에 얻어낸 성과였다.     


현진영부터 시작된, 기획사의 의도와 의지 아래 아티스트가 완성되는 SM의 시스템은 이후 CT(Culture Technology)라는 이름으로 진화한다. 캐스팅, 트레이닝, 프로듀싱, 매니지먼트를 모두 포함하는 이 치밀한 스타 양성 체계는 그대로 SM이라는 조직의 매뉴얼이 되었으니, 이는 자연스레 “한 팀의 곡을 만드는데 전 세계 6백여 팀이 한 번에 움직이고, 일주일에 2백 곡 이상이 만들어”지는 송 캠프의 산파 역할까지 해낸다. 하지만 모든 일이 만사형통일 순 없는 법이라, SM의 이 공장형 시스템은 자연스레 문제점도 노출할 수밖에 없었다. 바로 발전적 대중문화가 가장 지양해야 할 대중 취향의 획일화다(언뜻 보면 지금 한국 대중음악에는 케이팝과 트로트 밖에 없는 것 같다.) 연습생 제도와 불공정 계약이 초래하는 아이돌 인권 문제 및 엇비슷한 콘셉트로 불거진 콘텐츠의 한계와 더불어 이수만이 구축한 케이팝의 대표적인 그늘 중 하나인 ‘취향의 획일화’가 문제인 이유는 한국이 세계를 공략하기 위해 이수만이 그토록 강조해 온 선진국형 ‘문화의 힘’은 다름 아닌 예술 장르와 그 예술을 즐기는 사람들이 가진 취향의 다양성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이수만은 불과 6일 전(2024년 7월 10일 기준) 대구에서 열린 세계문화산업포럼(WCIF)에서 이렇게 말했다. “과거 우리가 선진국을 배우기 위해서 유학을 갔듯이 지금은 해외에서 한국으로 케이팝을 배우러 많이 오고 있다. 전 세계인이 한국을 배우러 올 때 한국의 문화 역량을 전 세계에 확산시킬 수 있도록 제도와 지원이 절실히 필요하다.” 여기서 그가 말한 ‘한국’과 ‘한국의 문화’는 모두 케이팝을 전제로 했거나 ‘케이팝=한국’이라는 거친 공식을 전제한 언급이다. 이수만은 한국과 한국의 문화에는 케이팝 외에도 훨씬 많은 것들이 숨 쉬고 있고 또 성장하고 있다는 걸 잊고 있는 듯 발언했다. 물론 그가 ‘케이팝의 아버지’일지언정 ‘한국 문화의 아버지’일 순 없다. 케이팝은 한국 문화의 부분일 뿐이다.     


이처럼 시장의 왜곡이라는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케이팝의 산실이던 SM은 승승장구했다. 이수만이 자평한 90년대 ‘프로듀싱의 시대’를 거치고 맞은 2000년, SM은 “일본시장에 진출하면서 대외공신력이 중요하다는 것을 절감”한 이수만의 의지로 마침내 코스닥 시장에 상장됐다. 이수만이 케이팝 프로듀서 1호였고 현진영이 케이팝 기획의 1호였듯, SM의 상장 역시 코스닥 상장 연예기획사로선 국내 1호였다. 비록 시작은 자산 95억 원, 매출액 125억 원에 불과했지만 상장 이후 SM은 공격적으로 몸집을 불려 시가총액 조 단위에 이르는 지금의 대형 기획사로 급성장했다. “음반 산업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내 궁극적 목적은 멀티미디어그룹이다.” 코스닥 상장과 공룡이 된 회사 규모에도 이수만은 만족할 수 없었는지 자신의 비전을 단순히 음악 산업에만 틀 지우려 하지 않았다. 과거 그는 음악업계도 프로듀서들이 자신의 콘텐츠로 보다 복합적인 토털 엔터테인먼트로 가는 단계라며 “SM을 아시아 최고의 토털 엔터테인먼트 그룹으로 키우고 싶다”는 포부를 밝힌 바 있다. 결국 훗날 그는 메타버스를 통한 케이팝의 미래를 이야기하며 아시아를 넘어 전 세계를 ‘광야’로 삼아 자신의 뜻을 이뤘다.     


이수만 프로듀서님을 굉장히 존경한다. 경영자와 프로듀서  가지 능력을 가지는  자체가 생각보다 기적적인 일이다. 이수만 선생님은 그걸 가지고 계신 분이었다. 감각이 굉장히 좋으시다. 감각이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단하신  같다


한 인터뷰에서 동방신기 출신 김재중이 한 말이다. 그는 SM에 있으면서 스타라는 빛과 불공정 계약 소송이라는 그늘을 모두 경험한 인물로, 이수만과 박진영 등을 롤모델로 삼아 본인이 직접 회사를 차려 제작자로 나선 현 상황에서 발언한 저 내용은 오로지 이수만이 가진 상업 예술적 수완의 본질만 전하고 있다. 과연 김재중의 말대로 경영자와 프로듀서 능력을 동시에 가진 이수만은 아직 업계를 떠날 생각이 없어 보인다. 올해 72세인 이수만의 개인 회사인 블루밍그레이스가 지난 5월 3일 ‘A20 엔터테인먼트’ 상표를 출원했기 때문이다. 지난해 2월 하이브와 SM 주식 매매계약 체결 때 포함된 ‘향후 3년간 경업 금지’ 조항과 그 조항에 대한 이수만의 해제 요청 내막이 오리무중인 상황에서 이 출원은 이수만의 강력한 신(scene)에의 복귀 의지로 해석된다. 반세기 이상 음악계에 몸담아 오며 30년 이상 케이팝의 탑을 쌓아온 이수만은 뒤를 돌아본 적이 없다. 그가 입버릇처럼 말해왔듯 이수만은 ‘수만(SM) 시즌2’라는 미래를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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