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의 상처가 조금씩 아물어 대중음악 시장에도 활기가 돌기 시작한 1960년대 한국에선 스탠더드 팝(Standard Pop)으로 통용된 서양풍 이지 리스닝(Easy Listening) 양식이 자리 잡았다. '이지 리스닝'은 말 그대로 미국 백인들이 가장 쉽게 들을 수 있는, 예컨대 프랭크 시내트라나 바브라 스트레이샌드가 부른 곡들처럼 기품있고 편안한 팝을 뜻한다. 60년대 한국에서 이지 리스닝은 트로트와 양대 대중음악 장르로 군림했다.
60년대 트로트를 이미자와 남진, 나훈아와 문주란이 대표했다면 이지 리스닝 쪽엔 패티김과 현미, 최희준과 정훈희가 있었다. 평안북도 출신으로 일본에서 음악 활동을 한 길옥윤과 '초우'를 쓴 작곡가 박춘석은 이 중 패티김을 스타덤에 올려주었고, 경남 남해와 진주에서 학창 시절을 보낸 색소포니스트 겸 작곡가 이봉조는 현미와 정훈희의 대표곡('보고 싶은 얼굴', '꽃밭에서')들을 써낸 뒤 승승장구했다. 이후 패티김은 길옥윤과, 현미는 이봉조와 부부 연을 맺기도 한다.
패티김의 목소리는 그야말로 폭발적이다. 어린 시절 국악원에서 남도창을 배우고 소프라노 김천애에게 성악 발성을 사사한 그의 가창은 그리움과 회한을 눈물에 잠기게 하는 대신 조영남의 말마따나 그것들을 "폭포처럼 쏟아"낸다. 나중에 임희숙이 물려받게 되는 이 후련한 음악적 감정 배출은 1959년 미8군쇼 무대에 서면서 대중음악계 첫발을 뗀 패티김의 미래에 가장 든든한 자산이 돼주었다. 그는 언젠가 이런 말을 남겼다.
나는 권투선수가 링에 오르는 기분으로 무대에 선다. 3분 동안 내 노래로 저 사람들을 내 사람으로 만들 것인지, 아니면 내가 당할 것인지가 결정 난다
과연 한국 대중음악계 불멸의 디바다운 자세, 마음가짐이다. 그는 이처럼 프로로서 자신감과 가수로서 자부심으로 정글 같은 엔터 업계를 50년 넘게 버텨냈다.
패티김의 옹골찬 창법이 잘 녹아든 곡 '가을을 남기고 간 사랑'은 1983년 어느 날 그의 부산 공연이 끝나고 박춘석이 당일 새벽녘에 만든 것으로 전해진다. 박춘석은 앞서 말한 길옥윤과 이봉조, '동백아가씨'를 만든 백영호와 함께 60년대 한국 대중음악계 4대 작곡가 중 한 명으로, 호텔 로비에서 그의 피아노 연주로 처음 들은 순간부터 패티김은 이 곡과 사랑에 빠졌다. 자신의 노래들 중 손에 꼽는다는 그것을 패티김은 가슴으로 불렀고, 그렇게 단 세 차례 녹음 끝에 곡을 역사에 새겼다. “날개를 접은 철새처럼 그대 곁에 잠들고 싶다”는 노랫말이 우아한 감동을 주는 '가을을 남기고 간 사랑'은 이후 '이별', '서울의 찬가', '그대 없이는 못살아', '초우' 등과 함께 패티 김의 대표곡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