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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대 Aug 28. 2024

엔믹스의 믹스팝, 더 대중친화적이면 안 되나요


음악에서 장르란 너무 많은 ‘다른’ 스타일들을 편의상 분류하면서 정착된 개념 군이다. 거기엔 단순히 대중음악(popular music)을 줄인 팝(pop)부터 록 음악에 여타 장르를 혼합했다는 뜻으로 일본에서 주로 쓰는 믹스처 록(mixture rock)처럼 현상을 요약하는 것들이 포함된다. 또한 재즈(jazz)처럼 어원을 깊이 파고 들어가야 하는 장르가 있는가 하면, 브릿팝(britpop) 마냥 특정 나라와 시대 문화 전반을 어우르는 장르 아닌 장르도 있다. 아울러 드럼 소리를 묘사한 의성어에서 나온 붐뱁(boom bap)은 올드스쿨 힙합의 대표 장르이며, 슈게이즈는 기타리스트가 악기 지판과 페달 등 신발(shoe) 쪽을 응시하며(gaze) 세상 우울한 연주를 한다고 해서 붙은 장르 이름이다.     


저러한 장르명들은 대부분 음악을 어떤 식으로든 정의 내리고 구분해 내야 한다는 부담을 갖는 평론가들이나 일반 청자들의 감상평이 표출되고 공유된 뒤 보편화 되는 식으로 굳어져왔다. 즉 음악의 당사자가 아닌, 그 음악을 듣고 평가하는 입장들에서 장르는 대부분 태어나고 조립되는 것이다. 믹스팝(mixxpop)이라는 것이 있다. 걸그룹 엔믹스가 데뷔 때부터 고수해 온 장르다. 뜻은 중의적으로, 한 곡에서 여러 장르들을 섞어(mix) 보이겠다는 의지가 곧 그룹 이름(mixx)과 중첩되는 식이다. 한마디로 단편들을 붙여나가며 하나의 온전한 장편을 꾀하겠다는 전략이 저 이름 속엔 숨어 있다. 언뜻 장르를 섞는다는 건 크로스오버(crossover)라는 말과 닮은 것 같지만, 섞은 뒤 한 팀의 고유한 정체성을 꾀한다는 측면에서 크로스오버는 믹스팝에 비해 정적이다. 한편으로 믹스팝은 핵심만 감별해 만든 요약 영상들과 쇼츠로 정보, 지식을 습득하는 요즘 시대의 모습을 닮은 작법이기도 하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믹스팝이란 게 새로운 건 아니다. 어차피 팝이라는 장르가 여러 장르들을 ‘믹스’한 결과물을 가리키는 것이므로 믹스팝이라는 말 자체가 동어반복적인 면이 있는 데다, 케이팝은 그 거대한 팝 장르에 나라 이니셜(K)만 붙인 꼴이어서 엔믹스의 믹스팝은 애초에 정체성의 한계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팝의 믹스’ 성향은 과거 투애니원이나 에프엑스, 현재 에스파와 스트레이 키즈가 대표하듯 케이팝 시장의 오랜 특징이었고, 곡 하나에서 변칙적인 시도를 한 건 57년 전 비틀스도 ‘A Day in The Life’ 같은 곡에서 들려준 것이므로 새롭다고 말하기엔 너무 오래된 방식이다. ‘Young, Dumb, Stupid’ 가사를 빌리자면, 한 컷 한 컷 찍어 자신들만의 웨이브를 만들겠다는 의지가 곧 믹스팝일 것이지만, 그 “경계가 무너진 무정형의 세계”란 이미 앞선 시도들이 너무 많았기에 살짝 거창한 면이 없지 않다.     


엔믹스는 2024년에만 미니앨범 두 장을 냈다. ‘Fe3O4: BREAK’와 ‘Fe3O4: STICK OUT’이다. 일단 제목부터 난해하다. ‘입덕’을 위해 이들에게 다가가 보려는 사람들에겐 앨범 제목부터가 난제다. 실제 속을 들여다봐도 그룹, 앨범이 처한 배경 설명과 설정이 필요 이상으로 장황하다. 음악이라는 게 본디 듣는 사람의 개별 감상으로 완성되는 게 이치라고 보면, 엔믹스의 음악에는 그 개별 감상을 방해하는 너무 많은 의미들이 전제돼 있는 셈이다. 즉 엔믹스를 받아들이기 위해선 그들의 세계관을 선행 학습해야 하는 피로가 결부되는 것이다. 이렇게 돌고 돌아 엔믹스의 고질적인 약점이 고개를 드니, 바로 난해함과 마니아 성향이다. 이는 이 장르 저 장르, 이 무드 저 무드 버무려서 자신들만의 색깔을 보여주겠다는 믹스팝의 철학과도 배타적으로 얽힌다. 기실 엔믹스도 대중의 관심과 사랑을 바라며 데뷔했을 터인데 그들 음악은 자꾸 대중을 밀어내고 있으니 난감하다. 데뷔 때 내세운 콘셉트이니 2년이 지나 바꾸기도 힘들 일. 그 뚝심과 배짱은 높이 사지만, 이들에게 멍석을 깔아주는 기획자 및 창작자들은 여기서 한 번쯤은 고민해봐야 하는 것 아닐지 모르겠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힙합의 자장 아래 펑크(Funk)와 펑크(Punk)가 만나 ‘힙’함으로 요동치는 ‘Dash’ 같은 곡도 나쁘진 않지만, 도대체 ‘Break The Wall’이나 ‘Love Is Lonely’ 같은 쉽고 대중적인 곡들은 왜 늘 필러인양 앨범 구석으로 밀쳐두는가 말이다. 마니아층을 위한 ‘Soñar (Breaker)’, ‘별별별 (See that?)’과 함께 저런 곡들도 뮤직비디오를 만들어 ‘엔믹스도 대중 친화적인 음악을 할 수 있다’는 그룹의 이면을 보여주는 게 팀에도 회사에도 득이 아닐까. 나는 엔믹스 음악을 들을 때 이 음악이 과연 누구를 위한 음악일까를 생각하곤 한다. 어떨 땐 엔믹스의 앨범이 믹스팝이라는 그룹 정체성을 명분으로 프로듀서 및 작사, 작곡가들이 자신들의 소스를 실험하는 장은 아닌가 싶은 생각까지 드는 것이다. 물론 그 역시도 기획자들의 ‘주문’에 의한 것이겠지만 표면적으론 그렇게 느껴질 때가 종종 있다.     


결론은 하나다. 엔믹스의 믹스팝이 조금 힘을 빼고 덜 난해한 쪽으로, 가끔은 일반 대중도 바라봐줘 가면서 롱런하는 것. 그나마 지난 미니앨범 두 장은 그 가능성을 들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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