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지(jazzy)하다’라는 말을 흔히 쓴다. 재즈라면 보통 즉흥 연주와 스윙감을 장르의 두 요소로 꼽지만, 사실 대중에게 그건 그리 중요하지 않다. 대중이 바라는 재지함이란 그저 느슨하고 침착하게, 쌓였던 피로를 풀어주고 바닥에 있던 감정을 끌어올려주는 긍정의 온기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술은 와인이, 계절은 가을이 어울리며, 날씨는 비나 눈이 내려야 제격인 장르. 대중은 그 장르의 이론이 아닌, 그 장르의 느낌을 사랑한다.
매년 연말마다 무언가를 들려준 뷔가 이번에도 새로운 겨울 노래를 가져왔다. 정확히는 박효신과 함께 부른 ‘재지한’ 팝 넘버 ‘Winter Ahead’다. 박효신과 뷔는 평소 가까웠던 사이로 보인다. 둘은 때때로 와인 한 잔을 곁들이며 좋아했던 음악들을 공유했다고 하는데 재즈는 그 과정에서 발견한 서로의 취향이었다. 뷔가 재즈를 좋아해 색소폰을 배우고 쳇 베이커를 좋아해 트럼펫을 배운 이야기는 익히 알려진 터. 와인의 취기 속에서 번져간 재즈라는 공통분모는 언젠가 두 사람이 재미있는 작업을 할 수 있는 가능성, 토대로서 마련된 상태였다.
박효신은 ‘Winter Ahead’에 관해 설명하며 미국 싱어송라이터 노라 존스의 빅히트 곡 ‘Don’t Know Why’에 작사가로 참여한 인물이 자신들의 곡을 도왔다고 했다. 박효신은 이 얘기를 하며 노라 존스를 ‘재즈 보컬리스트’로 특정했는데, 사실 그녀의 22년 전 앨범이 재즈 명가 블루노트(Blue Note)에서 발매되긴 했지만 당시 재즈 전문가들과 장르 순수주의자들은 그 앨범을 재즈로 인정하지 않았다. 익히 알려졌듯 노라 존스는 재즈보단 포크와 컨트리를 동반한 개성 있는 팝 보컬리스트에 더 가까웠다. 노라 존스가 그나마 재즈에 근접했던 상황은 전설적인 색소포니스트 웨인 쇼터와 베이시스트 존 패티투치, 오르가니스트 로니 스미스 등이 참여한 2016년작 ‘Day Breaks’였을 테지만, 역시 대중은 그런 것들에 크게 개의치 않았다. 중요한 건 ‘Don’t Know Why’가 머금은 재지함이었고, 그래서 그 노래는 대중에게 재즈로 받아들여졌다. ‘Don’t Know Why’는 지금도 재즈 팝의 대명사 같은 곡으로서 세련된 담백함이 필요한 장소 또는 상황에서라면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다.
그러니까 박효신의 말은 그 ‘Don’t Know Why’의 가사를 쓴 제시 해리스라는 인물이 ‘Winter Ahead’의 작사를 거들었다는 얘기다. 제시는 공허한 상실의 고독을 다룬 노라 존스의 노래와 달리 뷔와 박효신의 노래에는 따뜻한 사랑의 속삭임을 채워주었다. 멜로디는 뷔가 가지고 있던 트랙을 틀어둔 채 박효신이 흥얼거린 데서 발전해 노랫말을 감쌌다. 약간의 기교를 곁들인 색소폰과 프리페어드 피아노(Prepared Piano - 나사나 고무지우개 같은 물체들을 현 위나 사이에 배치해 일시적으로 소리를 변형시키는 피아노)로 문을 여는 곡은 뷔와 박효신이 버스(verse)를 주거니 받거니 부른다. 다시 같은 순서로 코러스를 소화하던 둘은 마지막을 짧은 하모니로 채색하고 1절을 닫는다.
2절에선 순서를 바꿔 버스를 부른 둘은 트럼펫 간주(혹 뷔의 연주일까. 크레디트에 명시해두지 않아 트럼페터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 뒤 어느새 자리를 잡은 스트링을 업고 마무리 브리지로 접어드는데, 여기선 앞서 맛만 보여준 화음 노래를 여유로운 핑거 스냅을 곁들여 길게 들려준다. 늦은 브리지를 딛고 곡이 절정에 이르며 색소폰 솔로가 스트링 사이를 희미하게 휘젓는 사이 바람 같은 하프(harp)가 모든 걸 수렴, 처음처럼 피아노와 색소폰이 차분하게 곡을 끝맺는다.
음악의 흐름만 나열해 좀 무미건조한 느낌이 없지 않은데, 그래서 이 노래는 더욱 각자가 들으며 음미해야 하는 작품이다. 가령 2절 가사 ‘there’s a winter ahead whether’ 중 ‘whether’에서 뚝 떨어지는 뷔의 저음이 마치 색소폰 저음처럼 들린다는 걸 글로는 써보았자 무용하리란 얘기다. 또 뷔와 박효신의 기존 스타일을 의심의 뇌리로 시뮬레이션해봤을 사람들에겐 은근히 근사한 첫 소절 자체가 점잖은 반전으로 들릴지도 모른다. 일단 뮤직비디오 감상은 조금 미루자. 이런 음악은 영상 없이 음악으로만 상상하길 권하고 싶다. 피그말리온을 모티프로 만든 뮤직비디오는 나의 눈엔 ‘과잉 제작’으로 보였다. 노래 혼자서도 충분히 튼튼한 문을 갖췄건만, 굳이 저런 진지하고 심각한 덧문이 필요했을까. 뷔의 ‘잘생김’과 연기력을 홍보하고 싶은 마음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뮤직비디오는 어디까지나 곡이 음악과 가사로 전하지 못한 것을 보충해 주는 차원에서 멈추는 것이 웬만하면 알맞다. 그래도 만들어야 했다면 차라리 두 남자가 와인 마시며 담소 나누는 싱글 커버 사진의 이야기를 더 발전시켰다면 어땠을까. 아니면 두 사람이 함께 노래하는 모습을 찍었어도 좋을 뻔했다.(이 글을 쓴 11월 29일엔 없던, 이 두 가지 콘셉트를 한 편에 담은 뮤비가 다음 날인 30일 공개됐다.) ‘재즈의 느낌’을 사랑하는 대중은 화려한 비극의 영상 대신, 뷔와 박효신이라는 듀오가 직조해낸 안식의 화음 속에 더 사무치고 싶었으리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