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개월 조카가 우리 집을 방문했다.
"혀이야. 나랑 놀자."
'혀이'는 '현이'를 부르는 말이고, 이는 시부모님댁 말티즈를 일컫는다. 아직 말이 서투른 조카는 연신 '혀이야~' 외치며 강아지에게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다가간다.
조카는 주변 모든 사물에서 놀라울 만한 인사이트를 나에게 제공한다.
"젤리는 쫄깃쫄깃해."
"숙모이모~ 나랑 놀이터 갈래?"
"우리 집에 같이 놀러 가자."
얼마 전까지만 해도 옹알이를 하던 조카는 이제 헤어짐의 아쉬움도 언어로 표현한다. 집에 돌아가는 걸 슬퍼하며 몸부림치던 조카는 내일 또 만나자고 다짐하고 나서야 울음을 그쳤다. ‘또 보자’는 다양한 빈말이 있음을 알게 하고 싶지 않아 다음날 또다시 만났다.
조카의 이런 솔직 발랄한 표현이 나에게 치유의 힘이 된다는 점을 깨달았다. 조카는 궁금하면 일단 해 본다. 좋으면 웃고 싫으면 운다. 조카의 삶은 즐거운 놀이와 같았다. 감정을 표현하는 법보다 예의와 규칙을 더 자주 주지하는 어른들의 세상과는 달리, 조카는 자기감정에 충실하다. 아이의 순수함이 정말 사랑스러워 오랫동안 내 마음을 간지럽게 했다.
'사람은 나이를 먹으면서 점점 더 재미없어질까?'
일요일인 지금, 당장 내일만 생각해도 설레는 일보다는 걱정되거나 마음의 짐이 되는 일이 먼저다. 휴가를 간 옆 동료의 빈자리도 잘 메워야 하고, 보고서도 잘 준비해야 하고, 내일 예약해 둔 새벽 운동마저 내가 스스로 등록했음에도 부담이 된다.
이 글을 쓰는 카페의 옆 자리 두 여성분의 대화도 마찬가지다. 드문드문 어쩔 수 없이 들리는 그녀들의 대화는 이미 걱정 한 가득이다. 이제 곧 이십 대 후반인데 마음에 드는 이성을 만날 수 있을지, 부모님의 노후를 어느 정도로 책임져야 할지, 지금 하는 일은 정말 내 적성에 맞는 것인지를 고민한다.
우리는 모두 어른이 된다. 그런데 이 과정은 어쩌면 설레는 일보다 걱정되고 두려운 일이 더 많아지는 것만 같다. 내가 몰랐던 세상의 한 구석을 아는 만큼 내 영역은 더 넓어지기보다는 좁아지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조심성도 그만큼 많아진다. '내 이야기가 기분 나쁘게 받아들이지 않을까?', '이건 그냥 넘어가는 게 좋겠어.', '이건 내가 참견할 일은 아니겠지' 등 걱정과 염려에 밀려 입은 무거워지고, 감정의 폭도 점점 좁아진다.
남편 앞에서는 숨은 어린아이의 모습을 한번 꺼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서운하면 서운하다고, 힘들면 힘들다고, 사랑하면 사랑한다고, 맛있으면 얼마나 맛있는지 예찬을 늘어놔 봐야겠다. 사소할수록 더 쉽고 마음이 후련할 것만 같다.
"아이스크림은 달콤 짭조름한 게 최고야", "청포도사탕은 새콤달콤해" "우리 집에 같이 가자(?)"
조카가 집에 방문해 나에게 가르쳐 주고 간 교훈을 마음속 깊이 고이 간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