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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염과의 전쟁

by 규리

우리 부부에게는 독특한 루틴 하나가 있다.

남편은 이 루틴을 일요일 아침에 행하기를 바라는 편인데, 바로 '제모'다.


사실 남편은 제모에 대해 처음에는 방어적이었다. 요즘도 제모 전 수염을 짧게 깎고 나오면 내가 사 온 제모기 앞에서 사시나무 떨듯 바들바들 긴장한다.


제모기를 사기 전 남편의 논리는 심플하지만 간결했다.

"아픈 게 싫어"


하지만 나의 끈질긴 조언과 회유 끝에 남편은 두 가지 길을 선택해야 했다. 피부과에서 전문 레이저 제모 시술을 받을지, 혹은 편안한 환경(집)에서 일주일에 한 번씩 구매한 제모기로 케어를 받을지 고민해야 했다.


나는 제모기를 구매한 후 총 12주 프로젝트로, 주말이면 면도한 남편의 얼굴을 무릎 위로 불러들인다. 두꺼운 피부가 고통이 덜하기에 얼굴도 바깥부터 안쪽으로 들어가는 방향으로 하여 심리적 안정감을 줄 수 있도록 한다.


남편은 몸은 큰 데 아픈 걸 무척이나 싫어해서 제모를 받기 전 나에게 연신 확인을 하는 편이다. 일전에 두꺼운 피부에 적합한 다리 제모용 헤드를 잘못 사용해 남편의 얼굴을 제모했는데 그때의 트라우마가 심하다.


SE_PL5387_Braun_Eclipse_different-heads_555x415_2x.png 부위에 따라 사용하는 헤드가 다르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해야만 하는 일을 해야 한다. 요즘은 먼저 맞는 매가 낫다며 연한 피부 순으로 제모를 해달라고 요청해 순서를 바꿨다.


인중 - 턱 - 볼 순이다.


제모를 마친 이후에는 스킨과 로션, 면봉 순으로 놀란 남편의 마음, 아니 피부를 진정시켜 준다. 스킨을 톡톡 두드려 건조한 피부에 흡수시키고, 앰플도 몇 방울 뿌려준다. 그리고 수분 크림으로 피부를 진정시킨다. 뭉친 목 마사지는 서비스다. 누운 김에 면봉도 꺼내 든다. 귓속을 한 번 파고, 다시 한번 파내고 건조한 귀에 바셀린을 발라 마무리한다. 고통에 몸부림치다 평안에 이른 남편은 기분 좋은 표정을 짓는다. 그러고는 '고마워!'를 해맑게 외치며 침대 밖을 빠져나간다.


이렇게 남편에게 고통 주고 약 주는 주말 아침의 시작.


남편의 굵고 검던 수염이 점차 연해진다. 남편이 면도날에 다쳐 피를 흘리며 나오는 일도 없고, 조금 더 잘생겨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더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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