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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규리 Dec 02. 2022

‘ASAP’은 정말 나쁘다

프로젝트 기간에 업무가 집중될 때면, 일주일 동안 김밥으로만 점심을 때우며 자리에서 일해야 할 때도 있었다. 정말이지 지하 식당에 갈 잠깐의 틈도 없었다.


물론 나도 잘 안다. 한 걸음만 떨어져서 상황이나 세상을 바라보면 그 정도로 바쁠 만큼 중요한 일은 없다는 것을 말이다. 하지만 아는 것과 현실은 다를 때가 참 많다. 광고회사라는 곳은, ‘외부조직(광고주)’와 ‘내부 조직’, 그리고 그 안에서 각자의 ‘열정’과 ‘감정’이 한 데 뒤섞여서 용광로가 되어버려 정상적인 가치 판단은 비정상적으로, 그 반대로도 쉽게 바뀌어 버렸다.


일례로, 어느 한 광고주는 커뮤니케이션 채널로 ‘텔레그램’을 사용할 테니 앞으로 이 앱을 항시 주시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 이후부터는 텔레그램을 통해 새벽이든, 주말이든 뜬금없는 요청에도 실시간 대응을 각 담당자는 처리해야만 했다. 그렇기에 당시 나에게는 온전한 휴일은 없었다. 내가 답장하지 않으면, 다른 동료, 선배를 통해 그 광고주는 “몇 시간째 연락이 되지 않는다”며 대신 연락이 전해졌다. 그럴 때마다 “내가 맡은 광고주(主) 일뿐, 내 인생의 주인도 아니잖아”라고 마음속으로 고요하게 외칠뿐이었다. 그 이후 한동안은 울리지 않는 휴대폰인데도 진동을 느끼거나 듣는 착각을 이따금 하기도 했다. 그만큼 매 순간이 불안한 시기였다.


다른 광고주는 업무시간에는 아무 말이 없다가, 퇴근 시간이 임박하면 “내일 아침까지 OOO 해주세요”라며 일을 던지고 가기도 했다. 그럼 그 일을 AE인 나는 죄송한 마음으로 유관부서와 파트너사 분들께 요청을 드려야만 했다. 새벽 몇 시에 넘어올지 모를 디자인이나 영상 파일을 기다렸다. 광고주가 출근하면 정리된 내용으로 확인할 수 있도록 새벽에 보고 장표를 만들어 메일로 보내 두고 쪽잠을 자고 출근했다. 주말에는 인쇄 시안을 보드로 뽑아 광고주 회사의 안내데스크에 맡겨놓는 일도 직접 하기도 했다.


이런 일들은 전태일 열사가 살던 그 시대의 일이 아니다. 오늘도 수많은 광고대행사는 이렇게 일하고 있다. 내가 일하면서 가장 많이 보거나 들은 단어가 있다면 그건 바로 이 단어다.


ASAP

As Soon As Possible로 읽기도 길다며,  ‘아삽’이라 부르는 외래어다.

광고주의 요구사항에는 그들 스스로도 그렇고, 광고회사 내부에서도 그렇고 저 용어를 많이도 썼다.

물론 광고주도 내부적으로 최종 결제나 의견 합치가 신속하게 이뤄지지 않아 대행사에 ASAP으로 요청되는 것이었겠지만, 우리는 우리의 일에 스스로 ASAP라는 꼬리표를 달고 늘 전속력으로 달려야만 했다. 우리 탓도 아닌데.


그렇기에 ‘ASAP’는 정말 나쁜 표현이다. 퇴근 직전에 연락이 와서 ASAP으로 요청하면, 저녁 약속을 취소하고 결국 그날은 집에 가지 못하는 사람에 대한 배려는 저 용어에 깃들어 있지 않다. 본인들이 쏘아 올린 ASAP라는 공이 얼마나 많은 사람을 힘들게 하는 것일지 조금은 생각을 해 볼 필요가 있다.


ASAP는 정말 정말 급할 때만 쓰자. 그리고 제발 조금이라도 미안한 마음을 갖고 다음에는 이런 경우를 피하고자 진심으로 노력해 보자. 어디까지나 우리는 파트너이지 갑을 관계가 아니니까. 나는 광고 일을 사랑해서 이 일을 선택한 것이니까, 이 일을 계속 지금처럼 사랑하게 해줬으면 하는 바람이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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