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산고 예비소집일 - 1
합격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 예비소집일이 다가왔다.
예비소집 당일날 새벽,
창문에서 어둠의 뱀이 똬리를 틀고, 전날 먹은 야식의 향이 은은히 올라오는 주방 식탁 옆 테이블에서 엄마는 발라드 음악을 조용히 튼 채 짐을 싸고 있었다. 폴 킴의 '모든 날 모든 순간'. 발라드를 즐겨 듣는 엄마의 애청곡이다.
"흠흠흠"
노래 한 구절씩 음미하시는 듯했다.
마법사가 비밀의 제약을 만드는 듯 엄마는 리듬을 따라 짐을 하나하나 가방에 집어넣으셨다.
한편 장난기가 발동한 아빠는 거실에서 폴 킴을 따라하고 있었다.
"너를 만나 참 행복했어"
아는 노래가 나오면 따라하는 아버지. 너무 웃기시다.
"어휴 아빠는 또 왜 저런 데니"
폴 킴의 감미로운 소리가 방향을 잃은 듯 흔들리기 시작했다.
공기의 선율을 타고 흔들리는 소리가 곧 아빠를 만나고 충돌했다. 불협화음이었다.
엄마는 짜증난 듯 말씀하셨다.
"여보 거는 다 챙겼어?"
아빠는 이미 다 챙긴 듯 했다. 핸드폰, 지갑, 차키. 아빠가 챙기는 유일한 짐이다. 항상 그랬듯 단조로웠다.
불협화음이 소동을 벌이는 사이 엄마는 마지막으로 휴지, 탭, 충전기를 가방에 집어넣으셨다.
나는 내 방에서 나의 가방을 챙기고 있었다.
검은색 내셔널 지오그래픽 가방.
부모님께서 고등학교에 입학한다고 사주셨다.
세로로 길쭉해 아무리 긴 문제집이어도 집어넣을 수 있었고, 수납 공간도 많아 이것저것 걱정 없이 집어넣을 수 있었다. 대신 좀 무거웠다. (이러다 키가 더 크지 않는 것은 아닐지 걱정되었다.)
내 탭,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 상산고등학교에 제출할 필수 서류 하나하나를 가방에 천천히 집어넣었다.
동생도 자기 방에서 짐을 챙긴 듯 하다.
준비를 다 끝마치고, 현관문으로 향했다.
현관문에서 하얀색 운동화를 신으며 창문을 바라보았다.
어두컴컴한 새벽 속 한 줄기 빛이 저 멀리에서 점점 새어나오고 있었다.
아파트 3, 4층 크기는 되보일까? 소나무의 푸른 잎이 보였다. 그 아래에 보이는 건 낙타 놀이터.
우리 단지의 정중앙에 있으면서 낙타 모양의 조형물이 많아 낙타 놀이터라고 불린다.
낙타 놀이터 옆에 나 있는 산책로를 따라 검은색 패딩을 입은 남자와 그 옆 빨간색 패딩을 입은 여자가 단란하게 걷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엄마까지 신발을 신고 나왔다.
면접 때와 같이 아빠 차를 탔다.
그 때와 유일하게 다른 점이라면 동생이 같이 나왔다는 점이다.
근데도 많은 것들이 달라졌다.
주차장을 나오는 순간부터 우리 가족의 이야기는 끊이지 않았다.
아빠가 지휘봉을 잡고, 엄마와 동생이 첼로와 풀루트를 연주하고, 내가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한 편의 오케스트라를 완성 중인 것 같았다.
전주 표제 음악
제 1악장 아빠의 개그 심포니
제 2악장 동생의 중학교 입학
...
제 7악장 상산고 스토리
제 7악장 연주를 끝마치니 전주에 도착해 있었다.
전주의 하늘은 파랗게 물들여 있었다.
눈은 내리지 않았다.
오전 10시
상산고 정문 앞에 섰다.
아직 학생은 많이 없었다.
사람 키 높이의 약 2.5배쯤 되는 정문 위의 LED 전광판에 상산고 예비소집일이라는 문장이 환히 빛나고 있었다.
환히 빛나는 문을 통과했다.
통과하며 면접을 보러 갈 때의 나와 지금의 나를 겹쳐 보았다.
뭔가 그 때보다 더 넓게 보이는 듯 했다.
상산고 정문 앞의 큰 돌들, 여름에 꽃이 필 것 같은 작은 초목들, 그리고 저 멀리 자신 좀 봐 달라고 흔들리는 소나무까지.
면접 당시 눈에 안 보이는 것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정문을 지나 한 달하고 반 전 올라왔던 언덕을 천천히 걸었다.
약간 누리끼리한 흰색과 적색 사각형이 반복되는 타일들로 이루어진 언덕길. 그 타일에 푸른색 하늘의 소리가 담겨 있었다. 언덕을 좀 올라오지 않았는데 내 오른편에는 하얀색의 및 바탕에 검은색과 남색이 섞인 여자 기숙사가 있었다. 아직은 휑한 초목들을 지나치며 계단을 올라왔다.
언덕의 중턱쯤 도달했을 때, 내 왼편에는 5층으로 추정되는 하얀색 남자 기숙사와 그 옆 그것보다 좀 작은 기숙사가 보였다. 그 하얀색 건물 사이에 파란색 반투명 유리창으로 된 아치형 통로가 있었다. 지하로 향하는 통로인 것 같았다. 4층의 하얀색 기숙사 앞 쪽, 학교 건물로 보이는 곳을 바라보았다. 아마 그곳이 내 교복을 맞추는 공간일 터였다. 남학생 1, 2명씩 나오고 들어가고 있었다. 그곳은 내게 익숙했다. 면접 마지막에 있었던 작은 강당인 것 같았다. 높은 계단을 올라갔다. 하얀색 투명한 문을 두 차례 열었다.
작은 강당의 그 큰 문 앞에 3명 정도 되는 학생이 줄을 서 기다리고 있었다. 뭔가 기다려야 할 것 같아 줄을 섰다. 한 명 한 명 작은 강당으로 가고 내 차례가 되었다. 교복 개수를 적기 위해 기다리는 줄이었다. 내 바로 앞 갈색 책상에 교복 개수를 적는 작은 노트가 있었다. 노트에 필요한 교복 개수를 적었다. 비로소 상산고의 학생인 것이 실감 나기 시작했다.
바로 옆의 묵직한 미드나이트 블루 문을 열고 들어갔다. 작은 강당 아래 무대 위 동복이 마네킹에 입혀져 있었고, 그 옆에는 회색 정장에 빨간색 넥타이를 맨 선생님 한 분과 평균에 살짝 미치지 못하는 키에 하얀색 후드티를 입은 학생이 교복을 맞춰보고 있었다. 무대 위 강당용 폴딩 의자에 나보다 먼저 온 남학생들이 앉아 있었다. 설렘, 귀찮음, 행복함, 신기함. 그들이 느끼는 감정이 내게로 스며들었다. 의자에 앉았다. 그 때와 마찬가지로 푹신했다. 오래 앉아 있으면 바로 잠 잘 것 같은 편안함이었다. 하얀색이 나가고, 검은색 패딩과 츄리닝, 키는 179cm 정도의, 약간 마른 체형의 학생이 교복 치수를 재러 의자에서 일어섰다. 저런 잘생긴 친구도 공부를 잘할 수 있음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검은색 학생이 비교적 빨리 나가고, 내 옆 남학생도 치수를 재고 나갔다.
마침내 내 차례가 왔다. 대략 5분 정도 기다린 것 같았다. 무대 위로 올라갔다. 내 뒤의 남학생들이 한 칸씩 자리를 옮기는 소리가 공기를 따라 흘러 들어왔다. 무대 위에 섰다. 회색 옷의 노란색 줄자를 든 손이 내게로 다가왔다. 회색, 손의 청록색 핏줄과 주름 그리고 줄자. 내 몸을 가로질렀다. 우디 향의 좋은 냄새가 났다. 뭔가 실험실의 쥐가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렇게 수차례. 끝났다는 선생님의 말씀이 들렸다. 무대 스테이지에서 내려갔다. 의자 사이에 있는 검은색 계단을 따라 작은 강당을 빠져나왔다. 내 인생에서 잊히지 않을 한 순간이었다.
작은 강당의 문을 열고 나오니 오전 10시 30분이었다. 오후 1시부터 예비 소집 일정 시작이었다. 대략 2시간 30분 남았다. 교복 치수를 재면 가족과 카페에 있기로 약속했었다. 그런데 이왕 언덕 중턱을 넘은 김에 상산고를 구경하고 싶었다. 아직 다 못 올라갔던 언덕을 걸어 올라가기 시작했다.
언덕의 경사는 점점 낮아져 갔다. 그렇게 점점 낮아지며 평지가 되었을 때, 넓은 운동장이 보였다. 중학교 운동장의 2배는 될 만큼 큰 운동장이었다. 운동장은 초록색 잔디로 이루어져 있었다. 올림픽에서 본 것 같은 붉은색 트랙이 운동장을 감싸고 있었다. 붉은색 트랙 위 총 3개의 야외 농구장이 있었다. 이런 운동장이라면 하루 종일 놀 수 있을 것 같았다.
야외 농구장 뒤에 높이 쳐져 있는 펜스 위로 전주 효자동의 한적한 풍경이 보였다. 저 멀리 새 2마리가 날아가고 있었다. 까치인 것 같았다. 가끔 개 짖는 소리가 났다. 평화로웠다. 10층 이상의 거대한 아파트는 1km보다 더 떨어진 곳에 있었다. 근처에는 단독 주택만 보였다. 그래서인지 확 트여 보였다. 시원한 풍경의 오른쪽에는 저 멀리 초록색의 높은 산이 전주를 감싸며 우뚝 솟아 있었다.
손에 쥔 핸드폰을 보았다.
1시까지 2시간보다 더 남아 있었다.
가족과 같이 있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그렇게 난 왔던 길을 한걸음 한걸음 내려갔다.
이 길은 이제 내가 앞으로 걸어갈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