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산고 예비소집일 -2
오후 1시
배정 받은 1학년 교실로 걸음을 옮겼다.
앞 문을 열었다. 이미 온 6명의 남학생이 보였다. 떨림의 쓰나미가 내 쪽까지 밀려왔다. 총 12개의 눈동자가 바라보는 시선을 느끼며 칠판 앞으로 가 정가운데에 붙여져 있는 자리표를 보았다. 맨 앞이었다. 좋지 않았다. 맨 뒤에서 입학할 동기들이 진단 평가를 푸는 모습을 보며 전반적인 실력을 체크할 계획이었는데. 맨 앞이라니. 그것도 단상 바로 앞이어서 고개를 위로 심하게 꺾어야만 선생님의 얼굴이 보이는 자리라니. 계획 실패였다.
저 멀리 해는 전주를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그 순간 선생님께서 들어오셨다.
노란색과 갈색으로 염색한 듯한 머리에 평균 정도 되는 키를 가진 여성 분이셨다.
반에 들어온 순간 공기가 뒤바뀌었다.
이게 아우라인 것인가 생각했다.
선생님께서 자기 소개를 하신 이후 수학의 정석이 배부되었다.
수학의 정석 저자이신 홍성대 전이사장님의 친필 싸인이 있었다.
무심한 듯 화려한 싸인. 나도 그 싸인을 쓰고 싶었다.
마침내 다 배부된 수학의 정석.
기숙사 입소를 위한, 상산고등학교 입학을 위한 필수 서류 몇 개를 제출했다.
제출한 서류를 모으고 정리하고 하나씩 확인하시며 선생님께서
"여러분 이제 곧 있으면 진단평가를 봐요.
다들 컴싸 준비하셨죠? 없으면 말하세요 여분 가져왔거든요."
라고 말씀하셨다.
"여분 필요한 사람?"
고개를 뒤로 돌리니 한 세네 명의 동기 학생들이 손을 들었다.
손을 든 동기가 하나 둘 앞으로 나와 컴퓨터 사인펜(컴싸)를 받고 자리로 돌아갔다.
나도 가방에서 필통을 꺼내 컴퓨터 싸인펜과 화이트를 책상에 놓고, 샤프와 지우개도 챙긴 뒤 다시 가방 속에 넣었다.
공기의 지루함이 텁텁해 창문을 바라보았다. 하늘색 바다에 흰색 파도가 치고 있었고, 그 아래에는 초록색의 산호와 형형색색의 물고기들이 헤엄치고 있었다.
앞에서 선생님께서 손목 시계를 확인하셨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시간이 5분 정도 남았는데 그 동안 상산고에 대해 질문을 받아 볼게요. 혹시 질문 있는 사람 있나요?"
조용했다.
30초 정도 지났을까?
키 크고 머리가 약간 길며 훈훈한 얼굴의 학생이 손을 들었다.
"지금 선배님들은 어디 계시나요?"
"방학이어서 다들 집에 있죠. 몇몇 학생은 잔류해서 남아 있기도 하고요."
용기 있는 학생을 따라 여러 명이 손을 들고
선생님께서는 질문에 답하셨다.
5분이 지났다.
선생님께서는 시간이 되었다며 우리에게 시험 잘 보라는 이야기를 남기고 떠나셨다.
선생님께서 떠나신 자리, 묵직한 종이봉투를 들고 선배님으로 추정되는 여자 (선배님)과 남자 (선배님)이 왔다. 두 선배님은 시험지와 마킹 페이퍼를 배부하셨다.
째각째각 소리
동기 학생의 다리 떠는 소리
기침 소리
일순간에 조용해졌다.
그렇게 시간이 되었다.
뒤집어진 국어 진단평가 문제지를 돌렸다.
문제를 본 순간 어지러웠다.
나는 지금까지 단 한순간도 고등학교 모의고사식 문제를 푼 적이 없었다.
오직 중학교 수준의 그리 어렵지 않은 문제만 풀었고,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여겼다.
자만이었다.
내가 안다고 믿은 모든 것이 무너졌다.
시와 수필로 이루어진 지문이었다.
평소 문학 책을 읽듯이 천천히 세밀하게 읽었다.
그 뒤 문제를 보았다.
표현상의 특징을 물어보는 문제였다.
'이런 건 모르는데..'
연필을 굴렸다. 4번이 나왔다. 4번을 찍었다.
그 다음 내용의 특징을 물어보는 문제를 보았다.
선지를 보니 2개가 헷갈렸다.
2번일지 5번일지 고민한 끝에 5번을 마킹했다.
그렇게 한 문제 한 문제를 풀었다.
모르는 문제와 헷갈리는 문제가 너무 많았다.
상산고의 시험은 역시 어렵다는 생각을 했다.
거의 시간에 다 맞춰 딱 풀었을 때, 종이 울리고, 남자, 여자 선배가 문제지, 마킹 페이퍼를 걷어가셨다.
남자, 여자 선배가 나가고, 키가 작고 안경을 낀 남자 선배와 키가 크고 회색 후드 집업을 입은 남자 선배가 수학 문제지가 담긴 종이 봉투를 가볍게 들면서 왔다.
수학의 정석 저자가 세운 학교의 수학 시험.
왠지 봉투가 더 빛나 보였다.
봉투 속으로 손이 들어가고 기대하던 수학 시험 문제지가 손과 함께 딸려 나왔다.
월척이었다.
빛나는 문제지 한 장 한 장 확인하시는 그리고 분단당 7개씩 배부하시는 그 손길.
마침내 문제지가 눈 앞에 왔다.
한참을 쳐다보았다.
종이 울렸다.
내 종이가 넘어가는 소리가 가장 빨랐다.
쉬운 문제들을 쑥쑥 푼 뒤 다음장
또 다음장...
그렇게 마지막 장이 다가왔다.
어려운 문제는 언제 나올까? 생각했다.
그렇게 마지막 20번을 마주했다.
그리 어렵지 않았다.
시험지가 그렇게나 가벼울 수 없었다.
원래부터 난 수학 문제를 좋아했다.
안 풀리는 수학 문제를 풀릴 때까지 끈질기게 몇 시간이고 붙잡고 푼 적도 많았다.
그래서인지 아니면 그냥 문제지가 쉬운 건지 수학 진단 평가는 잘 풀렸다.
내심 어려운 문제가 나오기를 바랐는데 실망했다..
검토를 5번 했다. 칠판 가운데에 놓인 시계를 바라보았다. 시험 종료까지 20분 남아있었다. 내 왼쪽을 바라보았다. 열심히 마지막 문제를 풀고 있는 것 같았다. 오른쪽을 바라보았다. 틀린 걸 발견했는지 들던 샤프를 내려놓고 갑자기 지우개로 박박 지우기 시작했다. 정면을 바라보았다. 키가 작은 선배님은 허공을 바라보시며 다리를 약간 떠시고 있었고, 키가 큰 남자 선배님은 우리를 계속 보시고 계셨다. 딴 생각 중인 것 같았다. 두 선배 모두 많이 심심해 보였다. 전 시간 여자 선배님께서는 수학 문제지를 가져와 풀고 계셨는데 두 선배님께서는 아무 것도 들고 온 것이 없는 것 같았다. 난 절대 감독하지 말아야지하고 생각했다. 지루하게 기다리는 시간으로 내 소중한 일초를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이제 10분 남았다. 마킹을 시작했다. 마킹하며 마지막 검토를 진행했다. 아뿔싸 큰일날 뻔했다. 마지막 문제에서 실수한 부분을 발견했다. 시계를 확인했다. 9분 남았다. 심장이 쿵쿵쿵 박동했고, 손은 점차 떨렸다. 침착하게 침착하게 풀자고 생각했다. 그렇게 문제를 다시 풀었다. 답이 나왔다. 실수를 한 것 같지는 않았다. 시계를 바라보니 5분 정도 남았다. 마킹을 끝냈다.
5분이 지났다.
종이 울렸다.
두 남자 선배가 떠나고 두 여자 선배가 들어오셨다.
마지막 시험인 영어 문제지를 담고 있는 종이 봉투를 들고 있었다.
10분이 흐르고, 시험 문제지를 뒤집었다.
영어는 그래도 공부했기 때문에 자신이 있었다.
아니었다.
첫 문제를 본 순간 자신이 없어졌다. 상산외고라는 소문이 맞나 보다는 생각을 했다. 꾸역꾸역 마지막 문제까지 시간을 다 쓰며 풀었다.
마지막 문제를 풀고 있을 때 앞을 슬쩍 보았다. 하얀 얼굴의 선배가 내 문제지를 유심히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살짝 문제지를 내 쪽으로 옮겼다.
부끄러웠다.
시험지를 옮기는 것도 힘들었다. 시험지 한 장 한 장의 무게가 그렇게나 무거울 수 없었다. 푼 문제들은 왼쪽 손으로 가리며 오른쪽 손으로는 마지막 문제를 풀고 있었다. 지문 하나하나가 너무 어려웠다. 이해가 안 돼 찍은 문제도 더러 있었다.
좀 더 열심히 공부할 걸 후회되었다.
마지막 종이 울렸다.
밖으로 나왔다.
나오는 애들에게 떠밀려 언덕을 지나고, 정문을 지나 가족과 함께 차를 타는 그 순간에도 열심히 공부해야겠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상산고에 입학할 그날이 두려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