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봄을 알리는 수선화를 그리워하며
2월 하순경 동네 주변의 큰 숲과 너른 평지가 아름다운 park에 가족과 함께 산책을 나갔을 때였다. 샛노란 수선화들이 봉오리진 채 새 봄을 알리고 있었다.
영국의 봄을 알리는 꽃, Daffodils. 그 선명하게 노란 빛깔과 종 같이 생긴 모양이 새로운 봄의 희망을 알리는 데 제격이었다. 그래서 영국인이 사랑하는 윌리엄 워즈워드(William Wordsworth)는 'I wandered lonely as a cloud'라는 구절로 시작하는, 유명한 'Daffodils'라는 시를 남겼는지도 모르겠다.
1,2월 lockdown이 있은 후, 다행스럽게도 백신접종률이나 사망률 등에서 지표가 개선되어 NHS의 수용력에도 조금씩 숨통이 트이기 시작하던 2월 하순에, 총리의 lockdown easing plan이 발표되었고, 그즈음 나간 산책에서 만난 수선화이기에 저 워즈워드의 시와 함께, 수선화가 참 예쁘게 다가왔던 기억이 난다.
또, 겨울이 워낙 스산했기에 봄꽃이 더 반갑기도 했다. 흔히 영국, 특히 런던의 날씨는 사람을 우울하게 하는 우중충함으로 악명이 높지만, 실제로 1년 런던에서 살아보니 꼭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일단 '스모그의 원조인 런던'이라는 생각에 걱정을 많이 하고 갔음에도 불구하고, 거의 대부분의 문제를 '심하게, 빨리' 겪은 후 해결하는 길을 찾아 걸어가는 그 나라의 스타일대로 그 이후 공기 질 개선에 많은 노력을 기울인 것인지, 미세먼지 걱정 없고 주변에 녹지가 많아, 공기를 서울에 싸 갖고 싶을 정도로 너무나도 공기가 맑았다. (사실 우리나라의 4학년 2학기 교과서였나에 보니, 서울의 공기가 안 좋기로 세계에서 수위권을 다툰다는 슬픈 내용도 실려 있었으니, 런던의 공기에 대한 부러움이 더 크기도 했다. Accuweather라는 날씨 앱에서 공기질을 보면 수치상으로도 런던 공기의 믿을 수 없는 그 쾌적함이 느껴졌다.)
그리고, 또 좋았던 것은 여름이 그리 덥고 습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런던에서 '폭염'이라고 해도 28도 정도이고 30도가 넘는 경우는 없었고, 그래서인지 대부분 창문을 열고 활동하고 에어컨이 우리나라처럼 상용화되어 있지 않은 것도 신기한 점이었다.
덥고 습하지 않아서인지, 모기도 없었다. 처음에 우리가 사는 집에 들어갔을 때 창문(안쪽에서 바깥쪽으로 밀어서 열리는 구조)에 방충망이 없어서 깜짝 놀랐는데, 실제로 여름에는 항상 그 문을 열어 놓고 살았고, 모기 등 벌레(영국인들은 gardening에 진심이고, 정원에 대부분 꽃들이 있어서, 가끔 그 창문으로 벌이 들어와서 놀란 적은 있지만, 다시 그 창문으로 내보내면 그만이었다)가 들어오는 건 볼 수 없었다. 영국인 이웃에게 물으니 모기가 없지는 않지만, 심각한 문제를 일으키지는 않는다는 답을 해 주었다.
물론 런던 날씨는 참으로 변덕스럽긴 했다. 오늘은 날이 참 좋다 싶으면 오후엔 어느새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고, 그러다가 또 그치곤 했다. 영국 신사들은 비가 잦은 날씨 때문에 우산을 늘 들고 다닌다고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우리 동네 사람들은 우산을 들고 다니기보다는 waterproof(방수) 후드 자켓을 입고 다니며, 비가 오면 그 모자를 뒤집어 쓰고 그치면 벗고 하는 경우가 훨씬 많았다.
영국 중에서도 스코틀랜드엔 산지가 많지만, 잉글랜드는 산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평지인데, 그래서인지 등산인구가 많은 우리나라와 달리 런던에서는 시도 때도 없이 조깅하는 사람들을 정말 많이 볼 수 있었다. 재미있었던 것은 비나 눈이 오는 날에도 그 후드 티의 모자를 뒤집어 쓰고 달리는 사람들을 항상 볼 수 있었다는 점이다.
우리나라 여름의 장맛비처럼 비가 많이 내리는 날은 극히 드물었지만(아마 그런 것을 거의 겪지 않아 대비가 안 되어서인지, 그런 날엔 뭔가 피해가 발생했다고 BBC 뉴스에도 나고, 기후 변화 때문에 이런 극단적인 날씨가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분석도 잇따르곤 했다), 워낙 비가 자주자주 내리는 환경에 있다 보니, 햇빛과 햇볕에 대한 사랑도 아주 지극했다. 날이 좋은 날이면, 우리 동네의 큰 공원에선, 그늘도 아닌 햇볕이 쬐는 부분의 잔디에 누워 있는 사람들을 쉽게 볼 수 있었다.(그리고 쯔쯔가무시 같은 위험이 없는 것인지, 잔디에서 데굴데굴 구르는 아이들이며 잔디에 그냥 눕거나 앉아 있는 사람들도 참 신기해 보였다.)
그리고 런던 날씨에서 가장 당혹스러웠던 부분은 일출시간과 일몰시간에 관한 것이었다.
영국은 3월 20일경부터 10월 20일경까지 summer time을 운영하여, 시계를 한 시간 빨리 맞춰 놓아 낮 시간을 길게 쓰는 시스템을 취하고 있었다. 서울의 위도가 37도 정도인 반면 런던의 위도가 50도에 달할 정도로 워낙 위도가 높기도 하고, summer time 효과까지 겹쳐 6월, 7월에는 21시 30분이 되어도 완전히 해가 지지 않았다. 그런 때는 늦게까지 이웃 아이들과 노는 우리 아이들에게, '시간이 늦었으니 얼른 집에 와서 씻고 자라'는 말이 잘 먹히지 않아 애를 먹었던 기억이 난다.
summer time이 해제된 10월 말부터야말로 가장 우울한 시기였다. 가장 적응이 안 되었던 문제는 4시반이면 해가 져서 깜깜해졌다는 것이었다. 6시도 안 됐는데 밤 9시는 된 것으로 보이던 깜깜함은 정말 묘한 기분을 갖게 했다.
겨울이 엄청 추웠느냐 하면 그건 아니다. 영하로 내려가는 날도 그렇게 많이 없었고, 영하로 내려가더라도 영하 1,2,3도였기에, 서울 추위에 비하면 날씨 자체는 따뜻했다.
하지만 비가 그렇게 자주 내리는데도 이상하게 겨울에 실내는 건조하게 느껴졌고, 살을 에는 듯한 추위는 아니지만 으슬으슬했으며, 무엇보다 해가 너무나도 짧았기에 겨울엔 집 안에서 차를 마시며 장시간 책을 읽는 등 조용한 활동을 많이 할 수밖에 없었다. 그 겨울 동안 축적된 에너지가, 날이 따뜻해지면서 결국 축구 등 많은 physical activity로 분출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런던 여행 책자에서도 런던 여행의 적기를 4월에서 9월 정도로 꼽는 것 같던데, 런던살이 1년 경험으로도 맑은 공기로 인해 색감이 저렇게까지 고울 수 있구나 느끼게 했던 파란 하늘과, 갖가지 모양으로 하늘을 수놓았던 구름(런던 하늘의 특징 중 하나가 구름이 많다는 것인데, 시시각각 구름 모양이 변하는 가운데 종종 맑은 날엔 예술적으로 보일 만큼 아름다운 구름을 감상할 수도 있었다)을 볼 수 있었던, 특히 4월부터 6월까지는, 눈이 부시다고밖에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잊을 수 없는 아름다움을 선물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