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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수학 시간에 가장 많이 쓴 건 바로 ‘등호’였다.
내신과 수능, 본고사 세 가지 요소의 비율로 대학입시를 치른 세대로서 특히 본고사를 대비한 수학 시간을 돌이켜 보면, 끝없는 ‘등호’의 계속, 그럼으로써 얼핏 보기에 같아 보이지 않는 수식이 다양하게 변주되는 것을 보며 감탄했던 기억, 또 진땀을 흘리며 스스로 등호를 써 가며 변주를 시도했으나 실패했던 기억들이 떠오른다.
수학은 대학만 가면 다 쓸모없다고 푸대접을 받지만, 수식 기저에 흐르고 있는 기본철학은 삶의 과정에서 문득 생각지 못한 철학적 메시지를 가지고 찾아온다. 그 끝없는 ‘등호’들은, 똑같은 사실도 관점에 따라 다양하게 구성할 수 있음을, 처음엔 막연하게 느껴졌던 풀이가 그 다양한 변주 속에서 실마리를 찾아 해결될 수 있음을 암시하는 신호가 아니었을까. 이것도, 저것도, 달라 보이지만 결국은 같고 동등하다는 명료한 메시지가 그 등호 속에 숨어있지 않았나 말이다.
그러나, 실제 사회는 부등호의 세상이다. 특히 우리 사회의 경우 어디에나 서열이 있다. 굳이 직급사회인 공무원 조직을 예로 들지 않더라도, 대부분의 회사 조직은 주임부터 회장까지 일렬로 배열될 수 있고, 그것은 예를 들어 같이 식사할 때 누가 어디에 앉고 숟가락을 놓느냐에 이르기까지 일상 전반을 지배한다. 근본적으로 우리 사회에는 학력(대학) 서열이 있고, 그 먼 파생으로 동네(무슨 구, 무슨 동)의 서열까지 있다. 자본화된 수치로 서열을 표시하는 것은 지나치게 노골적이고 천박한 면이 있지만 자주 활용되고, ‘평판’과 ‘일반적 인식’이라는 이름으로 두루뭉술하게 불리는 서열 관념은 생각보다 매우 견고하다.
슬픈 것은,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처럼, 그 서열이 자기 정체성을 정립하고, 인격을 형성하는 데까지 영향을 미칠 가능성도 있다는 점이다. 자리(서열)에 초연한 사람도, 사회에서는 코스프레라도 해야 ‘안전’하다고 여겨진다.
사람 사는 게 다 비슷하고, 또는 아기 키우는 집 사정 다 비슷한 것과 같이, 세상에는 완전한 등호까지는 아니어도 ‘등호’의 관점에서 볼 수 있는 사정이 충분히 있다. 그리고, 그 (잠깐의) ‘등호’ 의식에 기초한 정서적 위안이 어느 때보다도 갈망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른바 ‘공식적인 세상’에서는 우리는 ‘평가’하여 사정없이 부등호의 세계에 편입시키고, 또 그렇게 해야 질서정연한 것 같고 속시원하다고 생각되는 것을 당연시하고 있다. 끝없이 이어지는 부등호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 ‘안정성’과 동일시되고, 부등호 바깥 세상은 ‘위험’하다고 인식된다.
부등호는 단순하다. 얼마나 크고, 얼마나 작은지도 알려주지 않고, 단순비교만 한다. 그래서일까, 부등호를 배운 건 초등학교 때 뿐인 것으로 기억된다.
명료하고 단순해 보일지 모르지만, 부등호는 그냥 그뿐이다.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제공해 주는 것은 등호요, 원래 ‘같다’는 것이 제일 단순하고 명료한 것이다. 그리고 사실 삶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단순하고 명료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