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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종목 Sep 01. 2021

협상-Part2. 근본적 목표의 중요성

"그럼 수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해 볼까요?"

교수는 슬라이드를 넘겼다. 


' Goal'


"어떠한 협상이든 가장 먼저 고려해야 하는 항목입니다. "


그래. '어떻게 원하는 것을 얻는가'의 스튜어트 다이아몬드 교수 또한 수많은 원칙과 요소들 중 목표가 가장 중요하고, 가장 먼저 고려해야 한다고 했지...


"목표를 정하는 것. 아무리 말해도 그 중요성은 다 표현할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협상을 진행하다 보면 목표를 망각하는 경우를 많이 볼 수 있습니다.


특히 감정에 영향을 많이 받는 것이 인간이다 보니, 상호 이익이 아닌 상호 손해, 

심지어 협상을 주도한 당사자가 더 큰 손해를 보게 되는 경우가 아주 많았어요."


한창 활동하던 시절, 수많은 사람들이 근본적 목표를 잊는 걸 목격했다.

분노, 복수심 등 비이성적인 감정에 영향을 받는 순간, 그 감정을 해소하는 것이 목표로 바뀌는 걸 봤다.

게다가 막상 복수 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지.


상대에 대한 분노를 풀기 위해 협상을 거부하다 보니, 유리하게 협상할 수 있는 조건과 시기를 놓치게 됐지.

속이 터졌다. 내가 뭐라고 하든 입 꾹 닫...젠장, 나보고 도와 달라고 할 땐 언제고... 에휴...


다 지난 일인데, 여전히 미련이 남았나 보다.

정신을 차려보니 강의를 많이 놓쳤는지, 슬라이드가 바뀌어 있었다. 

검은 화면이 보인다. 

하긴 스타일 상 ppt를 많이 쓸 것 같진 않았는데, 아예 준비된 슬라이드가 끝난 모양이다.


"그 어느 때라도 협상의 목표를 잊어서는 안 됩니다. 

특히 자신의 이익이 극대화될 수 있는, 깊이 있는 근본적 목표를 세우고 달성해 나가야 합니다."


맨 앞 줄, 후드티를 입은 남학생이 손을 들었다.


"교수님, 그런데 깊이 있는, 근본적 목표라는 게 구체적으로 뭡니까?"


교수는 빙긋 웃으며 시선을 모두에게 보냈다.


"좋은 질문이네요. 한 번 대답해 볼 사람?"


"제가 대답해 보겠습니다." 


제법 똘똘해 보이네. 뭣보다 예쁘고. 좋을 때다.

당당하게 보이려고 애쓴 티가 나는, 앳된 얼굴의 여학생이 나섰다.

주변 남학생들의 눈빛이 밝아지는 걸 보니 다들 보는 눈은 비슷한가 보네. 


"순간적이고 근시안적인 얕은 목표에 정반대 되는 개념이죠. 예를 한 번 들어볼게요.

편의점에 들어온 손님이 땀을 흘리며, '콜라 한 병 주세요'라고 하는데 콜라 재고가 딱 떨어진 상황,

A라는 점원과 B라는 점원이 전혀 다른 응대를 하는 상황을 상상해 볼까요?"


꼬맹이가 예습 좀 해 왔군. 유명한 이야기를 마치 자기가 떠올린 것처럼 말하네. 귀여우니 들어준다.


"A는 '콜라가 다 떨어졌네요.'라고 손님의 요구에 대한 응답을 했습니다.

B는 '콜라 대신 시원한 사이다나 주스 있는데, 그건 어떠세요?'라고 했지요.


A는 표면적 요구에 응대했습니다. 

반면 손님의 요구를 듣고 '시원하고 탄산이 있는 다른 음료'를 권유한 B의 행동은 상대의 내적 욕구를 추측하여 새로운 대안을 제시했지요.


A의 목표는 뭐였을까요? 손님의 요구에 대답을 하는 행동으로 표현된 그의 목표는 '질문에 답을 하자.' '카운터를 잘 지키자.'로 보입니다. 


손님의 욕구를 추측해서 다른 음료를 제안하는 행동을 통해 표현된 B의 목표는? '고객만족, 가게 이익 확보'가 아니었을까요?" 


발표를 마친 그녀는 얼굴에 '나 쩔지?'라고 써 놓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금방 우쭐해질 나이지. 논리도 괜찮았지만, 어투나 표정만 보면 프로가 따로 없네. 명사 특강 오신 줄. 

물론 소꿉놀이하는 느낌이 특히 돋보이긴 했지만. 


그녀가 첫 수업의 스포트라이트를 가져갔다고 자타의 공인을 받으려는 순간, 손을 들었던 후드티 녀석이 입을 열었다.


"글쎄요. 그냥 자신의 역할을 좋은 태도로 하려고 한 거 아니었을까요? 

점원 입장에서 목표를 딱 정하는 시간이 있었을 것 같진 않은데... 

있었다 해도 '고객만족, 가게 이익 확보'라는 목표를 세우진 않았을 것 같은데." 


오호라... 재밌는 놈이네. 어디든 저런 꼬인 놈이 있지. 난 예전부터 저런 놈을 싫어하지 않았고.


"... 그러네."

"맞아, 편의점 알바가 근본적 목표를 세우나?"

"손님이 한 두 명도 아니고."


웅성대는 주변의 이야기에 볼이 조금 빨개진 여학생이 외치듯 반박했다.


"어... 그... 그건! 점원이 가진 동기와 목적을 비하하는 것 아닌가요? 애초에 예시였긴 하지만, 그런 훌륭한 대처는 근본적 목표를 세웠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생각합니다!"


"비하한 거 아닌데요? 그리고 그냥 점원의 행동과 태도가 좋았다고 해서 근본적 목표를 세운 거라고 말할 수 있나 싶은데요. 일상생활에서 '내 목표는 이러이러한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얼마나 된다고..."


네가 꼬투리 잡는 것도 인정해라 짜샤. 하기사... 관심 표현을 저렇게 하기도 하지. 

모범생 아가씨가 발끈해서 뭔가를 더 말하려는 순간, 교수가 먼저 나섰다.

쩝, 재밌었는데...


"하하. 그만.

저는 두 사람이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네요. 

깊이 있는 근본적 목표큰 그림을 볼 수 있는 시야가 동반돼야 합니다. 


그런데 큰 그림을 헤아려서 모든 것을 고려해 세워지는 목표도 있지만, 대부분 일상생활에서는 남학생이 말한 것처럼 자기 '역할'에 충실하려는, 지극히 개인적 관점으로 만들어지기도 하죠. 별도의 계기나 과정 없이 말입니다. 


재밌는 건 그 '역할'에 이미 연관된 사람들의 이익이 다 연결되어 있지요. '점원'이라는 역할에는 고객 만족을 위한 서비스, 가게 매출 신장이라는 이익이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요. 그래서 저기 여학생이 말한 근본적 목표를 세운 것과 다르지 않은 겁니다."


한 사람 역할을 제대로 해 내는 게 쉽지 않은 이유지...

별 것 아닌 역할에도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의 이익이 달려있단 말이야. 

나는... 그걸 몰랐던 걸까... 회피했던 걸까...


내가 또 멍 때리는 사이 교수는 미소와 함께 말을 이었다.


"넓게 보는 시야, 깊이 있는 근본적 목표가 무엇인지 생각해보면 사물과 관계, 역할의 '본질'에서 그 답을 찾게 됩니다. 그래서 더 중요하고, 가장 먼저 고려해야 하는 것이겠죠?


재미있는 건 본질에 충실했던 점원 B의 제안에도 불구하고 손님은 그냥 나가버릴 수도 있습니다. 

내적 욕구가 '콜라'였다면 말이죠. 그게 협상의 재미있는 부분이죠. 


여기서 질문, B는 협상에 실패한 걸까요?"


"상호 이익을 얻지 못했으니 실패라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시도를 했으니 A보단 훌륭한 점원입니다."

"협상이라고 할 수도 없는 것 아닌가요?"


비슷한 의견들만 나오네. 흠...

잠시 생각하다가 나는 입을 열었다.


"바라보기 나름이지만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B의 제안은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손님도 원하는 것을 얻지 못했지요. 

하나 마음을 헤아려주고 니즈를 추측해서 해결해 주려고 노력하는 행위는 대부분 호감을 가지게 됩니다. 


그 손님이 다시 올 지는 모르지만, 잠재적인 재방문 가능성을 올렸다 볼 수 있으니 가게에 이익이 됐네요. 손님 입장에서는 단순 대답을 듣는 것보다는 기분이 좋았을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으니 그 또한 이익입니다. 상호 이익을 얻었으니 좋은 협상이었네요."


"오호... 재밌네요. 저도 비슷한 생각입니다. 그런데... 처음 보는 얼굴이네요. 우리 학부 학생... 은 아닌 것 같고?"


"아, 저도 모르게 그만... 협상에 관심이 있어서 청강하러 온 ㅇㅇㅇ입니다. 내용이 너무 흥미로운 나머지 지나치게 몰입해 버렸습니다. 죄송합니다 교수님."


"애초에 학생이 아닌데?? 아저씨잖아."

"저건 청강이 아니라 도강 아닌가...?"


수군대는 학생들을 보며 가슴속에 끓어오르는 뜨거운 무언가가 느껴졌다. 아 이게 대학의 열정인가? 아니면 화남이거나... 쥐방울만 한 놈들...!


"조용들 하세요." 

미소를 띤 교수님은 이전과 다르지 않은 톤으로 학생들을 진정시켰다.  


"다양한 시선을 제공해 주실 것 같아서 더 좋군요. 환영합니다. 제 수업에는 배우는 사람과 가르치는 사람만 있습니다. 편히 들으러 오세요. 토론이나 질문도 얼마든 참여해도 좋습니다. 대신..."


입가에 띈 미소는 그대로... 아니 뭔가 개구쟁이 같은 느낌의 웃음이었다. 이런 표정을 짓는 분이었나?


"시험도 꼭 치셔야 합니다? 과제도 제출해야 되고요. 좀 늦는 건 봐 드리지요."


"... 아... 그건... 좀... 지나던 길에 들렀던 터라"


"그래요? 아까는 협상에 관심이 있어서 찾아왔다더니?"


"... 아... 그렇긴 한데요..."


"그것만 지키면 됩니다. 똑같이 수업에 참여하는 것. 제 수업에는 배우는 사람과 가르치는 사람만 있다고 했죠?"


"... 네..."


"아, 참. 팀 과제도 다 참여하세요. 다시 한번 환영합니다. 자, 오늘은 여기까지!"


뭐라 반박하지도 못하게 수업 종료를 선언한 교수는, 내가 누군지 관심도 없는 양 강의장을 빠져나가 버렸다. 


이 나이에 쥐방울만 한 놈들과 함께 시험을 보게 될 줄은 몰랐는데... 내 학번이랑 20년 가까이 차이 나는 놈들과... 인자하게만 보였던 교수의 얼굴에 감춰진 능구렁이를 못 알아챈 내 잘못이다. 


그래, 뜻하지 않았지만 시간도 생겼겠다, 젊어진 기분으로 수업이나 열심히 들어볼까!라고 했지만... 내 기분만 젊어졌다는 걸 주변 꼬맹이 대학생들의 눈빛에서 다시금 실감할 수 있었다. 이렇게 된 이상 팀 과제를 기대해라, 애송이들아. 조별과제 잔혹사를 보여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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