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제대로 만끽하는 방법
나이에 따라 다르게 흘러가는 시간. 그 이유와 해법에 대하여
“나이가 들면 왜 시간이 빨리 가냐고?”
퉁명스러운 표정으로 그는 되물었다. 하지만 이내 살짝 미소 지으며 책장에서 새 공책을 하나 꺼냈다. 그리곤 한 페이지를 조심스레 찢은 후 그 위에 연필로 점을 엄청나게 많이 찍기 시작했다. 지나치게 열심히 찍는 그를 보면서 ‘이 인간이 또 왜 이러나’ 싶기도 했지만 눈에 불을 켜고 하는 걸 말리기도 좀 그래서, 옆에서 그저 바라보고 있었다. 숨까지 살짝 몰아 쉬던 그가 말했다.
“... 자... 여기 점이 몇 개 찍혔지?”
‘이게 뭔 소리야?’
“엄청 많은데요? "
“그치...금방 못 세겠지?"
라며 뿌듯해하는 걸 보니 ‘잘했다고 칭찬을 할 걸 그랬나?’ 하는 생각이 스쳤다가, 우쭐한 표정에 괜히 오기가 생겨 한 번 세어보려고 했다. 그 순간 이 인간이 종이를 뺏어서는 지우개로 대충 벅벅 지우더니 선을 몇 줄 쓱 긋는 게 아닌가? 그러고는 줄마다 숫자를 하나씩 매기기 시작했다.
“여기 선이 몇 줄 있냐?”
“7이라고 쓰셨으니 일곱 줄이네요.”
“이런 거야. 시간이라는 게. 점과 선을 세는 것과 같은 거지.
어릴 때는 시간을 점과 같은 순간순간으로 느낀다고. 그러니 시간이 길게 느껴지지.
순백의 종이 위에 점을 꽉 차게 잔뜩 찍으면 그 점이 몇 개인지 세기 힘든 것처럼.
그런데 모든 걸 정의 내리는 데에 익숙한 성인은 시간 또한 ‘정의’라는 틀에 가둬버려. 어른은 시간을 사건의 발단부터 종결까지로 인식해서 단어로 정의 내려버리지. 긴 선을 긋고 숫자를 붙인 것처럼 말이지.
더 나아가 하나의 단위인 일, 월, 년을 이 사건과 연결해서 인지하게 된다고.
게다가 어른의 종이는 아이와는 달라. 반복되는 일상 때문에 이전에 찍은 점과 선들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거든. 어떤 이는 찢어지기도 했겠지. 그러니 새로운 선 몇 줄만 세어도 꽉 찬 것처럼 생각되거든. 그러니 시간이 빠르게 느껴지는 거야.
아이에게 ‘오늘 어땠어?’라는 말을 하면 잠시 멍 해지거든? 아이에게 있어 하루는 정말 복잡하고 다양한 시간이었을 거야. 깨어있는 12시간 남짓한 시간의 하루 동안 요 녀석은 울다가 웃다가, 짜증도 내고, 배도 고팠다가, 심심하다가, 재밌다가, 친구랑 싸워서 속상하기도 하고 혼나서 또 화도 났다가, 간식 먹고 기분 풀렸다가, 잠깐 졸렸다가, 눈이 번쩍 뜨일 만큼 신기한 걸 마주하기도 하고 어제 놀던 것을 가지고 놀면서 ‘어제보다는 덜 재밌네 왜 그런 걸까?’라는 의문도 던지고, 새로운 말을 들어서 그 뜻이 궁금하기도 하고, 처음 먹는 음식 때문에 놀라기도 하는 등 엄청나게 다이내믹한 경험들을 했는데 그걸 ‘어땠냐’고 물으니 당연히 멍해질 수밖에. 물론 ‘좋았어, 행복했어’라고 엄마 아빠에게 립 서비스를 하기도 하지만, 녀석은 아마 속으로 ‘그걸 어떻게 다 말해’라고 할 수도 있겠지.
그런데 점점 커가면서 가장 큰 사건(가장 큰 감정을 수반한 사건)만 말하게 된다는 거지. 해당 사건이 그 단위 시간을 대표하는 기억이 되어버리는데, 그게 처음에는 한 시간이었다가, 오전- 오후였다가, 하루가 되는 거지. 왜냐고? 반복하다 보니 새로운 자극, 경험들이 많지 않거든. 지난주를 돌아봤을 때 특별한 일 한 두 가지 말고는 안 떠오른다면 너의 시간은 이미 엄청나게 빠르게 흐르고 있다는 거야.
인간은 새로운 자극이 없으면 늙을 수밖에 없어. 참 슬프지? 왜 슬프냐고? 신체의 노화도 슬프지만 시간이 빨라져서 슬퍼.
사랑하는 사람들을 생각해 봐. 이미 있거나, 그다지 없었더라도 살면서 반드시 생긴다고. 사람이 아니라 동물이나 취미 뭐 그런 거라도. 그런데 늙어서 내 시계가 빨라지면 그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확 줄어드는 거야. 물리적 시간도 줄어들면서 내가 느끼는 주관적 시간도 함께 줄어드는 거지. 그렇게 인생 후반부가 되면 큰 기억들만 기억되는 거야. 소소한 추억들 없이. 부피는 같은데 밀도의 차이가 생기는 거지.
그러니까 아이처럼 순간에 집중하자고. 매일 마주치는 모든 것들을 새롭게 볼 수는 없더라도, 조금 더 만끽해 보면서 살자. 평생 마셨던 물도 의식해서 마시지? 느끼기에 따라서 전혀 새로울 거야. ‘이런 질감이었던가? 이런 맛이 났던가?’ 쉬었던 숨은 셀 수도 없을 거야. 근데 집중하면 여태껏 쉰 숨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느끼게 되지.
매일 보던 가족 얼굴도 어제와 또 다르다? 아내의 눈가의 주름을 자세히 보면 웃어서 생긴 주름이 있거든? 그런 보물을 발견하는 재미를 아니? 아이가 커가면서 변해가는 이목구비가 얼마나 신비로운지 몰라. 눈망울이 한결같으면서도 늘 다르다고.
단순히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정의 내린 대로 그들을 바라보지 마. 무슨 말이냐 하면 아내, 아빠, 아들, 친구. 이런 말들과 함께 연결된 내 머릿속 기억들, 정의들로만 생각하지 말고, 문득문득 그 순간의 그 사람 자체를 느껴보라는 거야. 그 사람의 존재를 온전히 느끼면 존중, 애정, 경외심이 절로 생기지.
영원을 살지 못하지만 더 값진 시간을 우리는 알고 있어. 그건 지금이야. 지금을 살자.
그게 너의 시간에 올라타서 삶을 만끽하는 방법이 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