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펜하우어를 찾는 시대로의 변화
20여 년 전, 저는 처음으로 쇼펜하우어의 책을 손에 들었습니다. 초급장교였던 당시 저는 일주일 책한권 읽기를 시작했고, 그냥 겉멋에 철학책을 집어들었었습니다. 그런제 진짜 뭔소리인지 하나도 모르겠어서 전체적인 흐름을 알고 싶어 읽었던 책이 "철학" 이라는 책이였습니다. 동서양의 철학을 넘나들면서 재미있게 설명을 했던 이 책을 저는 지금도 제 지근거리의 책장에 꼽아두고 있습니다.
이책을 통해 철학의 큰 흐름을 이해할 수있었고, 그냥 젊은이의 치기라고 해야하나요 그런 마음에 니체를 읽기 시작했던 기억이납니다. 그 와중에 쇼펜하우어를 알게 되었고, 쇼펜하우어의 책을 읽으며 세상의 그에 대한 편견과는 달리 너무나 현실적인 그의 글에 제 자신은 위로와 세상을 살아갈 힘을 얻었던 기억이 납니다.
하지만 세상은 그에게 '희망없는 회의론자', '비관주의자' 라는 탈을 씌워놓고 비판을 하고 있더라구요. 마치 니체를 읽지도 않은 사람이 니체의 "신은 죽었디"는 말을 어디서 듣고와서는 '파괴의 철학자'라느니 '사탄'이라느니 하는것과 동일한 것이였다고 생각합니다.
(아마 그때부터 책을 읽은 사람인지 아닌 사람인지를 구분하는 눈이 틔여졌던것 같습니다.)
실제 그의 대표작인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는 한 번 읽고 덮기엔 버거운, 무겁고 차가운 글들로 가득했던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쇼펜하우어의 철학에서 저는 이상하리만치 깊은 위로를 받았습니다. 그의 한마디 한마디는 "그래 수고했어, 너의잘못이 아냐~"같은 위로와는 차원이 달랐습니다.
마치 차가운 손으로 제 등을 한대 후려갈기며 "정신차려" 라고 소리치고, 돈을 쥐어주며 "가서 고기 사먹고 힘내" 라고 말해주는 느낌이였습니다. (이건 제가 어려웠던 시절 실제 경험입니다. 이후 저는 힘들다는 사람이 주위에 있으면 위로해주지 않습니다. 고기를 사줍니다.)
그는 "고통은 삶의 본질이며, 기대는 곧 실망으로 이어진다"고 말하지만,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순간 삶에 대한 집착과 억지가 오히려 사라지고, 자신을 있는 그대로 마주하는 힘이 생깁니다.
"우리는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어떤지를 통해 세상을 본다."
이 문장을 처음 읽었을 때 저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세상이 괴로운 것이 아니라, 내 안의 시선이 괴로웠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시선은 내가 책임져야 할 나만의 것이었습니다. 결국 나를 구원할 사람은 나 자신밖에 없다는, 냉정하지만 묘하게 따뜻한 결론에 도달했던 것이지요.
물론 지금은 그 시절보다 훨씬 더 나이를 먹었습니다. 결혼도 했고, 가족도 생겼고, 40대 중반이 되어 아이들의 교육을 걱정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예전처럼 냉소적인 철학에 기대어 살진 않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가끔씩 쇼펜하우어를 펼쳐보면, 그의 말 속에 시대를 초월한 통찰이 깃들어 있음을 느낍니다. 나이 들어 느긋해진 시선으로 그의 글을 다시 읽으면, 그 안에서 인간에 대한 깊은 연민과 이해가 보이기 때문입니다.
최근 한국에서도 '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라는 책을 비롯하여 그의 철학이 다시 주목받고 있습니다. 한때는 '우울한 비관주의 철학자'로 취급되었던 그가 이제는 '현대인의 멘토'로 불리고 있는 현실은, 시대가 요구하는 정서가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현대 사회는 끝없이 행복해야 하고, 끊임없이 성장해야 하며, 비교 속에서 항상 더 나은 무엇이 되어야만 한다고 말합니다. 그런 피로한 삶 속에서 쇼펜하우어는 정반대의 메시지를 던집니다. '세상은 원래 고통스럽고, 인생은 본래 결핍된 것이다.' 이 말은 듣는 사람에 따라 매우 부정적으로 들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미 지친 사람에게는 이러한 진실한 통찰이 오히려 진정한 위로가 됩니다. '아, 나만 그런 게 아니구나.' '원래 그런 거였구나.' 하는 안도감이 밀려옵니다.
"행복은 고통의 부재에 불과하다."
"인간은 고통과 권태 사이를 오가는 진자와 같다."
이러한 말들이 지금 시대에 다시금 공감을 얻는 이유는, 우리 모두가 지나친 욕망과 자극의 시대를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쇼펜하우어는 우리에게 '덜 기대하고, 덜 집착하라'고 말합니다. 그가 말하는 고독과 절제, 명상의 가치는 아이러니하게도 디지털 과잉 시대에 더욱 절실한 메시지가 되어 다가옵니다.
저는 철학이라는 것이 원래 절대적인 진리를 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사고를 유연하게 만드는 도구라고 생각합니다. 과거에는 "쇼펜하우어는 너무 어둡다", "삶을 포기한 철학자 같다"고 평가받던 사람이, 지금은 마음을 위로해주는 존재로 받아들여지는 현상은 철학자의 변화가 아니라, 시대와 사람들의 변화입니다.
결국 우리가 어떤 생각을 하며 살아갈지는 '시대가 만들어 준 사고의 틀' 안에서 결정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기에 철학을 공부하고, 다양한 관점을 받아들이는 일은 그 틀을 벗어나게 해줍니다. "너도 그럴 수 있고, 나도 그럴 수 있다"는 열린 마음, 다양한 생각을 수용하는 자세가야말로 지금 우리가 가장 필요한 태도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삶이 언제나 고통스럽고, 복잡하고, 기대한 만큼 흘러가지 않더라도 괜찮습니다. 쇼펜하우어가 말했듯이, 우리는 그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는 ‘이성’을 지닌 존재이니까요.
"인간의 위대함은 바로 그 고통을 인식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을 계속 살아낸다는 데 있다."
철학은 현실을 바꾸지 않지만, 현실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을 바꿔줍니다. 그리고 그 시선이 바뀌면, 인생도 조금은 달라집니다. 지금 다시금 쇼펜하우어가 재조명받는 이유도 그 때문일 것입니다. 다시 읽는 그의 글에서, 우리가 미처 보지 못했던 진실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진실은 조용히, 그러나 깊게 우리 마음을 어루만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