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낭비'라 말 하신다면..

마흔에 깨달은 삶의 이치를 고전의 대화를 통해 말하다.

by 이로



“차라리 그 시간에 다른 일을 하지 그래요? 답도 없는 수수께끼를 푸느라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요”
“네가 만약 나만큼이나 ‘시간’을 잘 안다면 시간을 낭비한다고 말하진 못할걸, 이건 ‘시간’이 아니라 ‘그 사람’에 대한 이야기니까”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모르는 게 당연하지. 넌 시간과 만나 이야기해 본 적이 없을 테니까”









학생 때 가장 기다리던 시간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단연코 ‘방학’이었을 거야. 특히 공부에 대한 부담감이 적었던 국민학생(초등학생) 시절의 방학은 하루 종일 놀고먹기에도 바쁜 나날이었지. 한 달 가까이 주어진 그 시간은 영원히 없어지지 않는 화수분과 같은 시간이었어.


그렇게 놀기 바빴던 나의 방학도 학년이 올라갈수록 마냥 놀며 보낼 수만은 없었어. 숙제도 숙제였지만 밀린 공부, 특히 성적이 부족한 과목을 집중적으로 공부해야겠다는 굳은 의지가 있었지.


아무리 내 의지가 돌덩이 같더라도 마음은 절대 돌이 될 수 없는 법. 단단한 나의 의지를 보여줘야만 했어.


방학 첫날, 나는 달력 같은 커다란 종이를 가져와 제법 큰 원을 그렸어. 그 가운데 중심점을 찍고 원에 닿을 때까지 사방으로 줄을 그었지.

그렇게 그은 줄은 여러 개의 케이크 조각을 만들어냈고 그 안에 시간대별 나의 계획을 써놓았지. 무엇인지 알겠지? 그래. 누구나 한 번쯤 그려 봤던 ‘생활계획표’야.


그런데 만들고 보니 먹고 자는 시간을 제외하곤 거의 공부하는 시간으로 채워져 있었어. 이럴 거면 왜 계획표를 만들었나 싶었어.

어린 마음에 시간 낭비하지 않고 열심히 공부하겠다는 의지의 표명 정도로 봐줄 만했지만, 그다음 날부터 방학 끝날 때까지 제대로 지켜진 날은 단 하루도 없었어.


생각해보면 공부하는 시간외에 다른 일은 의미 없는 시간이라 생각했던 것 같아. 그만큼 공부를 잘하고 싶었고 또 해야만 했으니까. 그 어떤 일보다도 나에게 의미 있는 일이라 생각한 거지.


그때부터 지금까지, 나는 성적을 올리거나 돈을 벌거나 무엇을 배우기 위한 시간만이 의미 있는 시간이라 생각했어. 친구를 만나거나 TV를 보거나, 혹은 혼자 멍 때리는 일도 때론 좋아했지만 오랜 시간을 보내는 것은 아무 의미 없고 시간낭비라 생각한 거지.






그렇게 우리는 어떤 일을 하는 것이 시간을 가치 있고 효율적으로 보내는 것 인가에만 초점을 맞추었을 뿐, 시간에 대한 개념이나 의미에 대해 생각할 겨를도, 필요성도 못 느끼며 지내 왔어.


그런 의미를 한 문장으로 줄이고 압축해서 나온 말이 누구나 잘 알고 있는 ‘시간은 돈이다’라는 명언이야.

맞아, 시간은 절대 돌이킬 수 없고 누구에게나 동등하게 한 번씩 주어진 거니까.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는 ‘돈’과 맞먹을 정도로 가치가 있으니 소중히 써야 한다는 의미라 생각했어.


그런데 이 명언, 되새겨 보면 볼수록 기분이 썩 좋지 않은 건 나뿐인 걸까? 그렇게 소중하다는 ‘시간’을 왜 하필 ‘돈’에 비유했을까? ‘시간은 밥이다’ ‘시간은 애인이다’ 등등 이런 표현이 더 친근하고 정감 있는 말 아닐까? 아무리 자본주의 세상이라도 말이야.


그런 의문을 가지고 종잇장처럼 얇디얇은 내 생각을 파보았어. 그리고 내가 발견 한 생각은 바로 이거였어.


그건 ‘돈 되는 일’ 즉 ‘정치 경제적으로 나에게 이득이 되고 도움이 되는 일에 시간을 쓰는 것만이 의미 있고 효율적으로 보내는 것이다’ 라는 의미가 들어간 게 아닐까 하는 나의 생각. 어때? 말 되지 않아?


아, 그래서 사람들은 공부하고 돈 벌고 인맥을 쌓는 일에 직간접적으로 투입된 시간만이 의미 있게 보내는 것이고, 돈 안 되는 아무짝에도 쓸모없어 보이는 취미나 잡담, 멍 때리는 시간까지, 해서는 안될 일로 치부해 버리는 것이었어.

아까운 내 시간. 이놈의 자본주의 사상이 여기까지 영향을 끼칠 줄이야.


물론 그런 목적으로 시간을 쓰는 것 자체가 나쁘거나 잘못된 건 아니야. 단지 우리가 말하는 ‘시간낭비’라는 기준 자체가 너무나 획일적이고 목적이 뚜렷하다는 거지.


우리뿐 아니라 부모님 아니 그 이전 세대부터 내려온 시간에 대한 가치 기준이 너무나 공고해서 시간의 진정한 의미와 가치에 대한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거야.


비록 세상이 많이 바뀌었다고 하지만 우린 아직도 먹고사는 일에 매달려 있어. 우리가 가진 시간 대부분을 각자의 일터에 소진시켜야만 겨우 인간의 모습으로 살 수 있는 세상에 살고 있는 거지. 그러니 ‘시간은 돈이다’라는 명언, 아니 그 진리 앞에 어떤 딴지도 걸 수 없게 된 거야.




그런데 ‘시간낭비’라는 말처럼, 우리는 정말 시간을 낭비할 수 있는 것일까? 그리고 그렇게 불릴만한 일이 과연 있을까? 만약 그런 일을 한다면 정말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것일까? 이런 의문에 스스로 답을 찾고 싶어 생각의 종잇장을 뚫고 생각해봤어.


우리가 어떤 물건을 사야 할 때 목적이나 의미가 분명히 있다면 두말없이 구입하기 마련이야. 남 보기에 아무리 쓸모없고 낭비되는 물건일지라도 자신에게 유용하거나 의미 있다면 구입하는 게 맞아. 그러다 쓸모없게 되거나 가지고 있어야 할 의미가 없어진다면 버려지게 마련이고.


우리 생이 다하는 그날까지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져 있고 흘러가고 있어. 그런데 물건 쓰고 버리듯, 필요 없는 시간이 있다고 버릴 수 있을까?


알다시피 시간은 절대 버릴 수도, 낭비될 수도 없는 존재야. 아무리 내가 쓰기 싫어도 쓸 수밖에 없는 보이지 않는 존재 인 거지. 단지 우리 스스로 그 시간을 ‘의미 없는 시간’ ‘낭비된 시간’이라 명명할 뿐.


각자 주어진 시간에 나름의 의미와 가치를 정해둔 것일 뿐, 우리 삶에 의미 없거나 쓸모없는 시간은 절대 없다는 게 내 지론이야. 그동안 우리 스스로 외면했거나 찾지 못했을 뿐, 어떤 시간의 순간에도 나름의 이유와 의미가 녹아 있기 마련이지.


그렇게 의미 있는 시간이 한두 개씩 쌓이다 보면 서로 충돌을 일으키기도 해. 그때마다 우리는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되지. 무엇이 내게 더 중요한 시간일까 하고 말이야. 내용에 따라 사안에 따라 의미의 경중은 있겠지만, 어떤 시간을 더 소중하게 여기든 내게 주어진 다른 시간 또한 충분히 의미 있고 소중하다는 생각을 잃지 않았으면 해.





만약 우리가 시간과 이야기할 수 있다면 그래서 시간에 대해 잘 알게 된다면 어떤 일들이 벌어질까?

매일 재방송되듯 의미 없고 재미없어 보이는 인생이지만, 매 순간마다 숨겨진 시간의 의미를 찾게 될 것이고, 그렇게 하나씩 찾아 갈수록 인생은 우리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행복의 시간들로 채워지게 될 거야.

그것이 바로 시간이 우리와 만나 이야기하고 싶었던 말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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