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한부 인생의 존엄사를 다룬 영화 <미 비포 유>( Me before you) 에는 가족들과 함께 ‘루이자’의 생일파티를 여는 장면이 있어.
할머니로부터 작은 앨범을 받게 된 루이자. 그 앨범에는 그녀가 어렸을 때부터 찍은 사진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어. 자신의 소중한 추억이 담긴 선물을 받게 된 그녀는 곧바로 할머니를 안고 기뻐하는 장면이 나오지.
이야기 전개상 중요한 장면은 아니었지만 내 눈에는 아직도 그 장면이 주는 여운이 길게 남아있어. 할머니가 아닌 아빠로서, 나 역시 딸에게 줄 성장앨범을 해마다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이지. 물론 두 해 정도 빼먹고 못 만든 앨범도 있긴 하지만.
딸아이가 태어났을 때, 내가 해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 무엇일까? 고민했었어. 그 결과 가족과 함께 보낸 추억을 선물하기로 결정한 거지. 비록 지금은 어린 나이라 성장 앨범을 보여줘도 그리 큰 감흥은 받지 못하겠지만 말이야.
하지만 그 아이가 자라고 또 자라 루이자 또래의 나이가 되었을 때, 받게 될 그 앨범은 자신의 인생과 함께 할 소중한 선물이 될 거라 생각했어. 그래서 태어난 순간부터 지금까지. 아이와 함께 보내는 순간을 사진으로 기록하고 정리해서 앨범으로 차곡차곡 만들어 가고 있지.
지금까지 거쳐간 시간들과 앞으로 거쳐 갈 수많은 시간 속에서, 우린 각자 주어진 삶의 방식대로 살아가고 의미를 부여하며 살아가고 있어. 그러다 자신의 인생에 큰 영향을 끼칠만한 일이나 사건이 일어날 경우, 그것에 스스로의 의미를 부여하며 오랫동안 잊지 않으려 노력하곤 하지.
하지만 우리 대부분은 순간 속에 숨겨진 의미는 외면해 버린 채, 망각의 세계로 영영 흘려보내 버렸어. 작고 소소한, 나에게만 의미가 담긴 순간들을 무심코 흘려보낼수록, 우리의 삶은 예전보다 헛헛해지고 무의미한 삶이라 생각하게 되지.
그런 작고 소소한, 자신만의 의미가 담겨 있는 순간을 기억하기 위해 우린 ‘기록’이라는 행위를 하게 돼.
‘기록’은 말 그대로, 후일에 남길 목적으로 어떤 사실을 적는 행위야. 자신이 경험했던 일이나 사건 또는 생각이나 느낌 등을 여러 도구를 통해 남기는 행위지.
원시시대에 남겨진 벽화만 보더라도 어떤 목적으로 그려진 것인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당시 사람들의 생각이나 의미가 그려진 기록으로 볼 수 있을 거야.
그 후 문명의 발달로 문자와 종이가 발명되면서 사람들은 글 또는 그림으로 자신의 생각과 사건을 기록하게 되었지. 그 대표적인 경우가 바로 유네스코가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등재한 ‘조선왕조실록’ 이야.
조선왕조실록을 200자 원고지로 옮겨 적으면 그 높이가 63 빌딩의 세 배에 이를 정도로 엄청난 분량이라고 해. 그 보다 더 대단한 건 이 기록을 통해 후세 사람들이 과거의 일을 떠올리며 올바른 생각을 할 수 있도록 돕는다는 역할에 있어. 이순신 장군이 쓴 ‘난중일기’ 또한 그러한 맥락으로 볼 수 있지.
물론 우리가 왕과 같은 지위를 가졌거나 사람들로부터 많은 존경을 받는 위치에 있다면 누군가가 펜을 들고 대신 우리를 기록해 주겠지.
하지만 따로 돈을 주고 사람을 사지 않는 이상, 대부분 각자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의 삶을 기록하고 있어.
그것이 바로 어릴 적부터 억지로 써야만 했던 일기였어. 생각해보면 매일 일기를 쓴다는 건 참 좋은 습관이었어. 그날 있었던 일을 생각하며 한 글자 한 글자 꼭꼭 눌러가며 썼던 그 일기장.
당시 세상을 알기에 너무 어린 나이라 크게 감명받을 일도, 크게 깨우칠 일도 없던 터. 선생님께서 내주신 숙제였으니 안 할 수 없어 개학하기 전날, 밤새도록 없던 이야기까지 만들어 썼던 기억이 아직까지도 선명해.
그런데 그 좋은 일기도 나 아닌 다른 누군가가 내 글을 본다는 사실이 문제였어. 그 누군가는 바로 숙제를 내주신 선생님.
방학 동안 쓴 일기를 고스란히 선생님 책상 위에 올려둬야 한다는 사실 때문에 정말 하고 싶었던 말을 솔직하게 쓰지 못하고 머릿속으로 미리 걸러내야만 했던 기억.
다들 있을 거야. 때문에 대놓고 말하지 못한 불만이나 원망스러운 말들을 글로도 표현하지 못한 채 마음속으로 삼켜야만 했지.
그런 일기로부터 해방된 우린 다른 방법으로 일상을 기록하기 시작했어. 그중 하나가 2000년대부터 시작된 미니 홈피의 열풍.
그 후 스마트폰으로 옮겨진 각종 온라인 SNS를 통해 디지털 세상으로 우리의 일기장이 옮겨지게 되었지. 이제 사람들은 전보다 손쉽게 사진과 글 그리고 동영상까지 무제한으로 올리며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얻고자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올리게 되었어.
하지만 최근 들어 이런 SNS 활동에 피로감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고 해. 그리고 가입자 수 또한 줄고 있다고 하지. 그렇게 열심히 자신의 일상을 기록하듯 사진과 글을 올리며 활동하던 사람들이 갑자기 외면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여러 원인이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바로 ‘나보다 남들이 더 행복해 보인다는 이유’ 였어. 자신이 가보지 못한 곳을 여행하거나 나 보다 더 날씬하고 아름다워 보이는 모습 등.
항상 행복하고 즐겁게만 사는 듯한 모습에 자신은 초라하고 무능하다 생각하며 끝내 자존감마저 바닥으로 떨어지게 된 거지.
SNS에 기록된 너와 나의 일상은 항상 즐겁고 특별한 일로만 가득 차 있지. 그런데 실제 우리의 삶도 과연 그런 일들로만 가득 차 있을까?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면 바로 알 수 있는 사실이야.
온라인상에 만들어진 일기장 역시 나를 아는 사람이든 모르는 사람이든, 누군가가 지켜본다는 사실 때문에 자신을 솔직하게 드러낼 수 없는 공간이었어.
마치 일기장을 대놓고 들여다보는 선생님의 시선처럼 말이야. 남보다 조금이라도 더 행복하고 즐거운 모습을 보이기 위해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이나 지금의 감정 등을 모두 드러낼 수 없게 된 거지.
글과 사진, 동영상 등등. 우리는 다양한 매체를 통해 독특하게 그리고 새롭게 자신의 일상을 기록하고 표현할 수 있는 세상에 살고 있어. 하지만 정작 우린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제대로 표현하고 기록하며 살고 있는 걸까?
‘기록은 잘못된 일을 성찰하게 하여 삶을 깊이 있게 해 주고 잘한 일은 흐뭇하게 떠올리게 하여 삶에 새로운 희망을 갖게 한다.’
오항녕 작가의 <기록한다는 것>에서
이제 기록은 더 이상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행복하게 보이기 위해서가 아닌 솔직한 자신을 드러내기 위한 기록이어야 해.
나의 하루는 어땠는지, 무슨 일이 있었으며 그때 감정은 어떠했는지. 아무리 사소하고 바람처럼 스쳐 지나가는 순간이라도, 생각의 시간을 돌이키며 진실되게 기록한다는 것.
그 기록을 통해 우린 지나간 시간을 되돌아보며 지금보다 더 적극적인 삶을 살게 될 것이고 감사한 마음으로 하루를 마감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아.
그렇게 이어진 나의 기록들은 어느새 훌쩍 커버린 자신으로 돌아오게 될 거야. 진실된 기록이 나에게 주는 깜짝 선물인 거지. 설령 이 글을 통해 오늘부터 시작된 나의 기록이 작심삼일, 삼일천하로 끝나더라도 상관없어.
왜냐고? 다시 작심삼일의 마음으로 시작하면 되니까. 그리고 3일 치의 기록이 주는 선물만 받으면 되니까. 안 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