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심한 내가 갑질에 대응하는 방법

by 이로

10여 년 전쯤 일이다. 새로 맡은 업무 인수 관계로 눈 코 틀새 없던 때, 직속 팀장과 부서원 한 명이 내 사무실로 찾아왔다. 참고로 함께 따라온 그 부서원은 나보다 12살 정도 많은, 한마디로 고참 중에 왕 고참 이었다.


팀장은 거두절미하게 그 부서원이 담당했던 업무 하나를 꺼내 들며 내가 그 업무를 담당할 것을 지시했다. 좋고 말고 가 없었다. 그냥 하라는 것이었다. 아직 담당업무조차 파악하지 못한 상황에서 내린 팀장의 고압적인 명령 앞에 난 가타부타할 것 없이 그대로 떠안아야만 했다.


그런데 팀장과 부서원이 가고 난 뒤, 뒷맛이 영 개운치 않았다. 뭔가 억지로 끼워 맞춘 듯한 업무지시에 한동안 고민하다가 전임자를 찾아가 물었다. 전임자 또한 나이가 좀 있었고 회사에서 한 성깔 하는 직원으로 유명했다.


이 업무를 내가 하는 게 맞느냐는 물음에 전임자는


“난 그 업무 해본 적 없는데..” 라고 말했다.



갑자기 온몸이 타오르는 전율이 느껴졌다. 내 안에서는 마그마가 부글부글 끓고 있었고 이대로는 도저히 잠 못 이룰 것 만 같았다. 올라가 따질까도 싶었지만, 동방예의지국에서 성실히 자란 난 그러지 못했다.


결국 나의 분노는 찻잔 속의 화산이었고 어금니 한번 꽉 무는 것으로 끝내야만 했다. 전열이 갖춰지기 전 기습을 당한 기분이랄까. 한마디로 뭣 같았다.


당시엔 ‘갑질’이라는 말이 널리 통용되지 않았던 때로, 난 이것이 갑질에 해당되는지 조차 몰랐었다. 조용하고 무난한 나의 회사생활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만 했던 그 업무는 지금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아주 성실히 해오고 있다. 하지만 그때의 기억은 6.25 전쟁처럼 잊어서는 안될 사건으로 남게 되었다.





그런데 이놈의 운명은 참으로 모질고 모질었다. 2년 전 회사가 통째로 이전하게 되면서 새로 인원 배치를 하게 되었는데 하필 그 부서원과 함께, 그것도 둘 만 있는 사무실에 앉아 일을 하게 된 것이다. (오호통재라!)


그 전까진 같은 팀이었지만 사무실이 달라 마주칠 일이 거의 없었지만, 이젠 하루 8시간 같은 공간 안에서 숨 쉬고 살아야 할 처지에 놓인 것이다. 10년 전 악몽이 되살아 나는 듯했지만 어쩌겠는가! 좋은 게 좋은 거라 생각하고 서로 도와 잘해보자는 마음으로 괜찮은 척하며 지내야 했다.


그렇게 지난 2년은 정말 별 탈없이 잘 지냈다. 누군가 자리를 비우면 그 공백을 잘 메꿔주었고 공동으로 대처해야 할 일이 생기면 협업으로 잘 마무리를 했다. 그렇게 별 탈 없이 지내고 있던 그때, 휴화산처럼 잠잠했던 내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르게 만든 일이 다시 발생하고 말았다.





회사는 올 초 정기 인사를 단행하면서 팀장과 사원 한 명이 타 부서로 전출 보냈다. 문제는 새로운 팀장만 그 자리에 왔다는 것. 떠난 사원 자리는 공석이 돼버렸고 누군가 그 업무를 도맡아야만 했다.


새로운 팀장은 고민 끝에 팀원 각자에게 업무 분담을 해야 하는 상황임을 설명했고, 난 자진해서 몇 가지 업무를 도맡아 하기로 결정했다. 문제는 비교적 난해한 업무 하나를 나와 그 부서원 중 누군가 해야만 하는 상황이 발생 했다는 것이다.


그 업무는 오래전부터 그 부서원이 했던 업무였고 거의 전문가 수준이었다. 그러다 회사가 이전하면서 젊은 사원이 맡게 되었고, 그 사원이 전출 가자 다시 우리에게 떨어진 것이다.


사실 난 그 부서원이 그 일을 맡아야 된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오랫동안 했던 업무였고 누구보다도 잘 알기에 그렇게 하는 것이 자연스러워 보였다. 물론 내가 할 수 있다는 가능성도 열어두었다. 만약 그렇다면 최소한 업무에 대해 서로의 생각을 공유한 후 결정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또 그렇게 하길 바랬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건 내 생각일 뿐이었다.





그 부서원은 나를 향해 해당 서류를 던지며 “이거 OO 씨가 할 거지? 난 못하니까 OO 씨가 해” 아무런 예고 없는 기습에 난 당황했다. 하지만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그 업무는 예전에 하셨던 업무고 또 사전에 서로 이야기를 해서 결정해야 되지 않겠냐고.


하지만 그는 막무가내였다. “OO 씨 하는 일이 뭐가 있어? 내가 보기엔 한가하던데. 난 하는 일이 많아서 못해. 정 못하겠으면 팀장한테 가서 못하겠다고 말해” 들을수록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힐 노릇이었다.


난 최대한 표정을 가다듬은 후 이건 아니지 않으냐며 말했다. 그는 코너에 몰렸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갑자기 사소한 트집부터 잡기 시작했다. 급기야 그는 “ 그 사원이 왜 전출 갔는지 알아?”라는 해서는 안 될 말을 해버렸다. 이 말은 내가 다른 부서로 안 가고 버티니까 그 사원이 대신 전출 간 거라는 뜻으로 상황이 이렇게 된 게 다 내 탓이라는 의미였다.


좋게 마무리하려던 내 얼굴은 이내 돌처럼 굳어졌다. 갑자기 10년 전 찍소리도 못하고 비굴하게 서 있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한 번 당했지 두 번 당해선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나이 또한 어디 가도 아쉬울 것 없는 마흔 중반을 넘어서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나잇값 제대로 해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난 밟으면 꿈틀거린다는 지렁이가 된 심정으로 최대한 감정을 누그러트리고 이성적으로 조목조목 따지기 시작했다. 극도의 감정표출과 행동은 추후 말도 안 되는 빌미만 줄 뿐이었다. 그러자 그는 사원 전출 이야기는 자신이 잘못 말했다며 순간 누그러진 모습을 보였다.





답답한 마음 감출 길 없어 팀장을 찾아갔다. 이야기를 들은 팀장은 어렵겠지만 내가 그 업무를 맡아줄 것을 부탁했다. 하필 그 팀장은 나와 오랜 인연이 있는 분이라 거절하기도 힘든 상황이었다.


그렇게 새 업무를 받은 후 며칠간 그 부서원과는 서먹서먹한 관계가 이어졌다. 그러다 좌충우돌 헤매고 있는 내 모습이 답답했는지 자신이 알고 있는 정보를 알려주며 적지 않은 도움을 주었다. 나 역시 내키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게 되었고 덕분에 빠르게 업무를 인수받게 되었다.


알고 싶지도 않고 묻고 싶지도 않지만 왜 내게 그런 말을 했을까 잠시 생각해보았다. 그러자 그 부서원의 정년이 2년도 채 남지 않은 상황임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20년 가까이 그 업무를 했으니 누군가 해주길 바랬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물론 그것이 아무리 타당한 이유가 된다 한들 자신의 편의를 위해 상대방에게 상처를 준 그 말은 백 번 천 번 사죄해야 할 일이다. 아니 단 한 번이라도 해야 한다. 물론 기대하지도 않지만 지금까지 묵묵부답이다.





얼마 전 친구들을 만났을 때 이 이야기를 꺼낸 적이 있었다. 그러자 한 친구는 “나라면 앞뒤 안 가리고 덤볐을 거야” 라 말하면서 다음과 같은 말도 했다.


“비록 네가 그 업무를 맡게 되었지만 상대방에게 적절히 따질 건 따지면서 그 사람이 가진 정보를 그대로 가져온 셈이니 길게 본다면 네가 상황 대처를 잘한 셈이야”


내가 오늘까지만 회사 다닌다는 심정으로, 될 대로 되라는 생각으로, 감정이 치솟아 오르는 데로 말과 행동을 쏟아냈다면, 앞뒤 안 가리고 덤비는 게 갑질에 대응하는 적절한 방법이 될 수도 있다. 최소한 속이라도 후련할 테니까.


하지만 이 회사, 나가라고 할 때까지 난 다녀야 한다. 책상머리라도 붙들 수 있을 때까지 붙들고 있어야만 한다. 아무리 좋은 인간관계도 넘지 말아야 할 선이 있듯, 아무리 갑질에 울화가 치밀어 올라도 넘지 말아야 할 감정의 선이 있다.






난 나를 밟으려는 갑질에 지렁이로 변신해 꿈틀거렸고, 10년 전 밟았던 그 발은 아마 움찔했을 것이다. 그 후로 그 부서원은 미안한 마음이 들었는지 알 수 없지만, 그가 가진 업무에 대한 정보를 고스란히 전수받으며 큰 어려움 없이 업무를 이어가게 되었다. 해당 팀장과 직원들에게 신임을 얻은 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말이다. 나에게는 적절한 대응이 된 셈이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 어디선가 갑질이 자행되고 있을 것이다. 그 행태는 밤하늘에 별처럼 무궁무진하게 일어나고 있을 것이다. 내가 대응했던 이 방법이 모든 갑질에 대한 정답이 될 수는 없다. 세상에 존재하는 사람 수만큼 갑질 또한 다양하게 발생되고 있을 테니까.


하지만 자신이 갑질을 당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 대응방법으로 한 번쯤 고려할 만하다고 생각한다. 일순간의 화풀이로 지금 당장은 속 시원할 수 있겠지만 뒷일을 생각한다면, 그리고 내게 무엇이 더 소중한지 한번 더 생각한다면 조금 더 현명하게 대처할 수 있는 방법이 나오지 않을까?


이미 우리 일상에 깊숙이 파고든 갑질을 조금이나마 해결하기 위해선 무엇보다 자신의 행동이 ‘갑질’에 해당되지 않을까? 하고 먼저 되돌아보는 것이다.


그러나 중이 제 머리 못 깎듯, 우리 옆에 누군가 갑질을 하고 있다면 우리가 알려주고 지적해야 한다. 그것만이 나이로부터, 지위로부터, 권력으로부터 소중한 우리의 자존감을 지키는 작은 출발점이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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