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리 마티스의 그림을 보고 평하는 컬롁터가 있었습니다. 그가 그림 속 여자가 팔이 지나치게 길어서 조금 짧았으면 한다고 하자 마티스는 "이건 사람이 아닙니다. 그저 캔버스에 물감으로 그려진 모양일 뿐입니다"라고 답을 했습니다.
제임스 조이스는 50년이 지나서도 자신의 소설 『피네건의 경야(Finnegan's Wake)』(1939)를 해석하려면 학자들이 쩔쩔맬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의 예상은 정확했습니다. 『율리시스(Ulysses)』는 그 정도는 아니라고 해도 나처럼 독자들이 이 소설을 이해하지 못해 얼마 읽지 못하고 포기할지도 모릅니다.
소설에는 20세기 초 아일랜드의 수도 더블린을 관통하는 주인공의 행로를 보여주는데 대도시의 소음을 배경으로 합니다. 시각적 인상도 도시의 광고판에서 도시를 덮은 하늘의 구름에 이르기까지 대도시의 풍경을 정밀지도처럼 자세히 그리고 있습니다. 아마도 이 소설의 문학성을 평가하는 학자들은 하루라는 짧은 시간에 이렇게 많은 이야기를 담아낼 형식을 발견한 조이스의 대담한 착상을 높이 평가했을 것입니다.
조이스는 『율리시스』를 자신이 스스로 선택한 망명지인 파리, 취리히, 트리에스테를 거치면서 집필했지만 더블린 시가지의 지리를 아주 정확하게 묘사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율리시스』를 도시 안내 지도로 사용해도 될 것이라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피카소도 여행길에서 어떤 사람이 "피카소 선생 당신은 왜 그림을 그렇게 사람의 모습을 삐뚤빼뚤 그리고 실상과 다르게 그리나요?"라고 하면서 자신의 아내 사진 한 장을 꺼내서 "이렇게 예쁜 여성의 모습을 그리면 얼마나 아름다운 가요?"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피카소는 "당신 부인은 지극히 작고 납작하네요" 하고 답한 적이 있습니다
예술은 과거의 규칙을 기계적으로 답습하는 것은 아니겠지요. 새로운 시선으로 형식과 내용을 채워가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새로운 시도는 늘 불안합니다. 예술가들도 자신이 제대도 된 길을 가는지 늘 불안하면서도 묵묵히 없던 길을 만들어왔습니다.
최근 졸저의 출판과 관련해 어떤 편집자를 만났는데 그 독특한 이력이 예상과 달라서 흥미로웠습니다. 문학도에서 음대생으로의 변신, 거기에 따른 직업적 변화는 잔잔한 호수 같은 내면에 세찬 풍랑을 일으킬만한 사건일 것입니다. 그렇지만 당사자는 규칙을 벗어난 삶에서 불확실과 불안을 안고 살았음을 넌지시 내비쳤습니다. 오히려 용기에 박수를 보내며 다르게 생각을 할 수 있는 힘을 잉태하는 과정을 겪었기에 예술가의 길을 가기에 좋은 캐리어라고 응원의 말을 전했습니다.
회화를 위한 데생 연습, 악보를 읽기 위한 음악공부는 기초의 영역일 수 있지만 응용의 단계에서는 과거의 규칙을 따르기만 하면 예술가가 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아마도 과거 대가의 모습에서 이것저것 모방하는 예술 직업인에 그칠 것입니다.
예술가는 새로운 영역을 창조하는 사람이고 그런 예술가에게 과거의 규칙은 지키기만 할 바이블이 아니라 때로는 피괴되어야할 무엇이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