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과 속물성

by 호림


예술가들에게 생활에 담을 쌓고 곡식이 떨어져도 경전을 읽었다는 조선시대 일부 선비의 자세를 요구할 수 없는 시대다. 세상 일이 다 그렇듯 정도의 문제가 있기에 중용의 지혜는 언제나 유효할 것이다.


짝 빼입고 다니던 신사 바그너는 늘 신수가 좋았다. 자신이 부자는 아니었지만 후원자를 구하고 돈을 빌리는 데 일가견이 있었기에 궁핍을 모르는 예술가였다. 고급 음식과 멋진 의상으로 나타난 바그너를 마다할 여성도

많지 않았을 것이다. 사랑도 대담해 딸 뻘의 나이인 피아니스트 코지마 리스트와 결혼하기도 했다. 코지마와 재혼 당시 장인은 프란츠 리스트였다.


프랑스의 작가 발자크는 늘 빚쟁이들에 시달리며 언제든 쓰다가도 뒷문으로 도망칠 수 있도록 집에 자신만의 비밀 통로를 열어놓았다고 한다. 한국의 이중섭도 가난한 시대에 물감과 캔버스를 구할 길 없어 담배 포장지에 '은지화'를 그리기도 하며 새우잠을 자며 황소의 꿈을 키웠다.

현진건의 소설 <빈처>에는 가난한 소설가 부부의 물질에 지배당하지 않는 소박한 삶이 보인다. 은행원 T와 처형의 부유한 삶을 대비시켜 궁핍한 시대상과 문학과 예술가의 생각하게 하는 작품이다. 시대가 변해도 예술의 밥벌이는 고단하다.


빈처에서 '나'는 출세와 부를 맹목적으로 따라가기보다 경제적 빈곤 속에서도 삶의 품격을 잃지 않으려고 한다. 그렇지만 주인공 '나'의 정신적 가치 지향은 현실 속에서 경제적 빈궁 때문에 끊임없이 갈등하며 현실적 욕구를 이겨내야 하고 '나'를 믿고 따르는 아내에게 미안함과 연민, 고마움의 감정이 느껴지게 만든다.

<빈처>는 가난하면서도 남편을 믿고 사랑하며 장래를 보며 살아가는 아내와 부유하지만 늘 불만족스러우며 삶의 보람 없이 살아가는 처형의 모습을 대비해 드러내고 있다. 이런 대비는 처가로 가는 도중 광목옷을 허술하게 차려 입고 청록 당혜로 걸어오는 아내의 모습과 잘 사는 친척인 은행원 T와 넓고 높은 처갓집 대문, 비단옷에 고운 신을 신은 귀부인 티가 흐르는 처형과의 모습으로 묘사하고 있다.


도스토옙스키도 <죄와 벌>에서 수전노인 전당포 노파와 가난한 청년 라스콜리니코프의 빈곤한 삶을 대비시키고 물적 조건과 인간의 삶을 비추는 명작을 탄생시켰다.

<빈처>에서 '나', '아내', '은행원 T', 그리고 '처형'의 모습은 그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이 작품은 이런 갈등 구도와 인간의 삶의 조건을 규정하는 물질의 모습을 묘사하며 예술가와 예술의 자리를 생각하게 한다.


소설 속 '나'는 장인 집에 모인 처형과 아내의 모습을 보니 너무 대조적인 모습이 너무나 안타까워 쓸쓸하고 괴로운 생각을 잊으려 술을 마셨다. 그때 처형의 눈 위에 시퍼런 멍이 든 게 보였다.

얼마 전 만난 판사 한 분이 떠올랐다. 정치바람을 타는 법원장, 대법관의 경로를 생각하기엔 능력도 그렇고 나이가 많고 그저 평판사로 공정한 판결로 직분에 충실하려는 욕심 외에는 없다고 했다. 한참 후배로서 당돌하게 보일 각오를 하고 선망하는 직업이지만 봉급 수준은 어떤지 물었더니 공무원이라 박봉이라면서 엄살을 보탠다. 그러자 다시 연수원 동기들이 변호사로 시장이 좋은 시절 전관예우도 받고 부를 축적할 때 다소 소외된 느낌은 없었는지 또 일찌감치 나와서 돈벌이라도 할 걸 하는 후회는 없느냐고 물었다. 빙그레 웃으며 안 그래도 아내가 지금이라도 공직자 옷 벗고 돈벌이에 나서라고 한다고 한다. 그렇지만 법정에서 너무 큰 욕심을 부리다가 탈 나는 사람을 많이 보니까 그런 아쉬움은 별로 없다고 하신다.


인간은 부단히 속물성과 다른 가치를 저울에 달면서 살고 있다. 뉴스를 장식하곤 하는 욕망의 언어들과 거액의 검은 거래들은 깨어지지 쉬운 인간의 내면을 보여주고 있다. 누구나 크고 작은 시험대에서 속물성과 인간적 존엄의 천칭 위에서 때로는 온몸을 떨면서 삶을 견디고 있다. 위대한 예술가들도 그렇고 <빈처>의 '나' 도 그랬듯이.

<빈처>의 슬픈 해피엔딩을 그대로 옮겨본다.


그날 '나'는 술을 여러 잔 마시고 집에 돌아왔다. 처형의 멍든 눈자위 이야기를 하며, 없더라도 의좋게 지내는 것이 행복이란 아내의 말에 '나'는 흡족해한다. 처형이 사다준 신을 신어 보며 좋아하는 아내, 물질에 대한 욕구를 참고 사는 아내에게 '나'는 진정으로 고마움과 사랑을 표시한다. 이에, 아내의 눈과 '나'의 눈에 눈물이 넘쳐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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