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익스피어, 빅톨 위고 그리고

세종을 생각하는 아침

by 호림

영국이 셰익스피어를 인도와 바꾸지 않는 이유는 영어의 지평을 넓혔기 때문일 것이다. 4대 비극 같은 그의 작품이 세계적으로 인정받으며 지금도 영화와 연극 같은 문화콘텐츠로 무수하게 무대에 올려지고 있다. 셰익스피어가 발견하거나 새롭게 작품에 사용한 영어 단어 수만 개는 영어의 풍부한 토양이 되었다.

영국에 셰익스피어가 있다면 프랑스에는 빅톨 위고가 있다. < 레미제라블>, <노트르담 드 파리> 또한 셰익스피어의 작품만큼이나 세계에 다양한 형식으로 프랑스어와 문학을 알리고 있다. 빅톨 위고는 귀족의 언어나 서민의 언어를 의도적으로 많이 작품에 넣어서 프랑스어를 픙부하게 한 일등공신이기도 하다.


대영제국의 위용은 말할 것도 없고 제국주의 시대에 막대한 식민지를 보유했던 프랑스의 위세에 불어의 영토 또한 넓혔기에 문화와 문학의 지배력도 영어에 버금가게 늘어났다. 한때 우리도 일제에 의해 언어가 말살될 위기를 넘기고 우리의 언어로 생각하며 우리의 문화를 만들고 있는 행복한 국민이 되었다.

한국의 문학작품이 셰익스피어나 위고처럼 세계적으로 읽히고 다양한 콘텐츠로 만들어지는 사례는 부족하다. 그러나 한글을 모르는 세계의 젊은이들이 BTS가 한글로 부른 가사를 따라 하기도 하기에 한글의 영토는 넓혀지고 있다.


언어구사가 사고를 지배한다는 것은 뇌과학으로 밝혀지고 있고, 모든 예술과 문화가 언어의 힘을 바탕으로 피어나는 것 또한 상식이다.

노벨문학상이 올림픽 금메달 따듯이 뚝딱 되는 일이 아니지만 매번 이맘때 수상 시즌이면 문화강국의 위상에 걸맞게 주어질 뭔가가 빠진듯한 허전함을 안겨주는 것이 사실이다. 그 작품성에 대한 한림원의 주관성이나 지역적, 정치적 고려가 전혀 없다고 할 수 없는 상황 또한 "그까짓 거 뭐 안 타면 어때" 하는 일각의 시각을 낳기도 하지만.


올해 노밸문학상은 탄자니아 출신의 영국 작가 압둘자크 구르나가 수상했다. 지구의 변방 동아프리카인의 소외감 같은 것들이 작품에 잘 녹아있다는 수상 명분도 들어있다. 흥미롭게도 수상작가가 한림원의 전화를 받고 보이스피싱 전화인지 알고 전화를 끊으려고 했다는 에피소드가 그 수상의 의외성을 말해준다.

광화문광장에서 세종을 만나 감사함에 고개를 숙인 건 오늘 월요일을 대체 연휴로 선물해서 고맙기 때문만은 아니다. 우리 언어로 풍부하게 표현하고 생각할 수 있게 해 준 고마움은 우리가 공기처럼 숨 쉬는 언어환경이기에 가끔 그 고마움을 잊어버린 것에 대한 미안함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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