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2차 대전과 나치의 광풍에 상처받은 한 사나이가 있다. 이 내면이 황폐한 헝가리계 유대인은 가족과 생이별하고 미국에 정착한 ‘라즐로 토스’(애드리언 브로디)라는 건축가다.
빈손으로 온 미국 이민자가가 부딪히는 냉혹한 현실 속에 라즐로는 전쟁의 트라우마를 견뎌내며 마약에도 손을 댈 정도로 극단적 유흥으로 무절제한 막노동자 생활을 이어간다. 구원의 천사는 이 외로운 영혼을 외면하지 않았다. 야수와도 같은 ‘라즐로’의 천재성을 알아본 부유한 사업가 ‘해리슨’(가이 피어스)이 기념비적인 건축물 프로젝트의 설계를 제안한다.
라즐로는 미국사회에 자리를 잡고 상류층과 교류도 하면서 부다페스트에 두고 온 옥스퍼드 출신의 아내를 미국에 불러들이는데도 성공한다. 영양실조로 반신을 쓸 수 없을 정도가 된 아내를 껴안으며 살아가는 라즐로는 해리슨과의 애증의 세월을 견디며 묵묵히 건축가로서 예술성을 작품에 담으려 최선을 다한다,
'브루탈리즘'을 추구하며 시대와 공간, 빛의 경계를 넘어 대담하고 혁신적인 그의 건축 설계는 사람들의 공감을 얻지 못하고 반대에 부딪히게 된다. 트라우마가 장엄한 예술로 승화되는 영화의 이야기는 흥미롭다. 215분이라는 러닝타임(15분의 인터미션도 있다)이지만 시선을 붙잡아두는 흡인력도 대단하다. 결정적인 반전의 모티브가 되는 이야기들은 다소 무리해 보일 때도 있다. 이탈리아 대리석 구입을 위한 출장에서 라즐로를 겁탈하는 해리슨의 돌발행동이나 동성애 코드는 조금 비약이 심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수십 년의 시간이 흐르고 1980년 제1회 베네치아 건축 비엔날레 현장이 보인다. 휠체어에 의지한 노년의 건축가 라즐로의 회고전이 열린 센터에서 중년의 조카, 조피아가 단상에서 라즐로의 업적을 기리며 우리에겐 과정이 아니라 목적지가 중요했다는 연설을 하면서 영화가 끝난다.
작품 속 등장인물들이 헝가리어를 사용하는 장면에서 발음을 보다 사실적으로 만들기 위해 음성 복제 AI를 사용했다는 사실로 인해 해외에서 논란도 있었지만, 브레이디 코벳 감독은 이 사실이 아니라고 반박했다. 이 영화는 긴 러닝티임이나 제법 큰 스케일에 비하면 1,000만 달러 정도의 제작비가 들어간 저예산급 영화다.
긴장감과 반전을 주는 영화적 재미는 합격점이지만 아쉬움은 남는다
선입견 없이 영화를 감상하려고 대개 세세한 분석기사나 평을 읽지 않고 관람하는 편이다. 건축 비엔날레 장면이 다큐멘터리식으로 묘사되어 역사적 사실을 모티브로 한 영화인 줄 알고 엔딩 크레디트의 설명을 응시하고 있었지만 온전한 픽션이었다.
이 영화의 장점인 매력적인 스토리가 거대한 서사의 울림으로 오랜 여운을 남기는 데는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왜 그럴까 자문해 보니 때로 논픽션의 힘은 픽션을 압도한다는 생각이다. <쉰들러리스트>나 <타이타닉>이 주었던 감동은 엄연한 역사적 인물과 사실들을 뼈대로 만들어간 스토리 라인이 큰 힘을 발휘하고 있다.
'브루탈리즘'이라는 용어는 프랑스어로 '노출 콘크리트'를 의미하는 베통 브뤼트(Béton brut)에서 유래됐다. 이는 프랑스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가 처음 사용했던 표현이다. 내가 착각했듯이 어원에 대한 정보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보니 브루탈리즘의 어원을 '잔혹한', '야성의'를 뜻하는 영단어 'Brutal'로 오인해 '잔혹주의'로 오역하는 일이 많다고 한다. 그래도 라즐로의 비극에 희생된 야수와도 같은 삶의 흔적들은 오역으로 바라보아도 합리적 착각으로 무리가 없어 보인다.
<부루탈리스트>, 다큐멘터리 기법의 컬트 계통이라고 영화 족보에 넣어 보면 어떨까. 영화관을 나서자 평화로운 일상처럼 보이는 공간과 사람들이 '제법 특이한 영화' 감상이라는 작은 감정의 전쟁을 치른 후에 덤덤하게 다가왔다.
라즐로의 큰 코처럼 눈에 잘 띄는 고통 속에 신음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타인의 상처들은 잘 보이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트라우마로 고통받고 살아간다. 상처를 도시의 소음으로 덮기도 하고, 때로는 술 한 잔을 부딪히며 요란하고 과장된 웃음과 관계망으로 잊으려 하기도 한다.
다른 사람에게 친절해라
대부분의 사람들은 당신이 모르는 고통의 심연을 가지고 있다.
- 무명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