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손톱 밑 가시는 타인의 거대한 고통보다 더 커 보일 때가 있다. 고통은 카타르시스의 재료가 되고 그 속에서도 삶의 새 희망이 움튼다. 영화와 드라마에서 수많은 고통의 쓰나미를 견뎌내는 주인공들에게 검정을 이입시켜 위로도 얻는다.
쇼펜하우어는 고통 또한 삶의 본질이기에 지혜롭게 껴안고 살아가라고 하고 니체는 고통스러운 삶을 초인적인 의지로 맞서라고 했다. 알을 깨는 고통이 있어야 새가 된다고 했던 헤르만 헤세도 고통 속에서 삶의 가치를 발견하라고 한다.
이 노벨상에 빛나는 작가는 한 때 경제적으로 극도로 곤궁하고 가정사 또한 어려움에 빠졌을 때 시 <가시 잘린 떡갈나무>를 썼다.
나무여, 네 가지를 어떻게 쳐냈는지
너는 너무도 낯설고 기이하게 서 있구나!
너는 수많은 고통을 겪으며
반항과 의지밖에 남지 않았구나!
나도 너와 같이 가지가 잘려 나갔고
고통받은 삶과 결별하지 못했다.
......
그러나 내 본질은 파괴될 수 없어!
나는 만족하고 화해했다.
수백 번 가지가 잘려 나가도
나는 참을성 있게 새잎들을 돋아나게 한다.
그리고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나는 미친 세상과 사랑에 빠져있다.
헤세는 이렇게 그의 시처럼 세상의 모든 고통을 느끼며 단단해지라고 한다. 우리가 대면하는 문제들이 언제나 깔끔하게 해결된다면 권태와 따분함이 또 다른 사치스러운 문제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문제의 크기는 다르지만 우리를 실험하는 크고 작은 고통은 우리를 더 큰 사람으로 만들어주기도 한다.
가지를 쳐낸 나무에서 새순이 돋듯 생의 또 다른 푸르름을 향해 아픔을 딛고 나아가는 것이 인간이란 직업의 본질이 아닐까. 재독 철학자 한병철도 최근작에서 말한다.
절망과 희망은 계곡과 산처럼 연결되어 있습니다.
절망이 지닌 부정적 특성은 희망에 새겨져 있습니다.
희망하는 사람은 담대하게 행동하며 삶의 갑작스러움과
힘듦에 굴하지 않습니다.
희망에는 무언가 관조적인 것이 있습니다.
희망은 앞으로 몸을 숙여 귀를 기울이기 때문입니다.
- <생각의 음조> 한병철 지음, 최지수 옮김, 디플롯, P.166
니체가 말했다.
나를 죽이지 못하는 고통은 나를 더 강하게 한다고.
Strauss: Also sprach Zarathustra / Dudamel · Berliner Philharmonik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