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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글을 쓰는가?

by 호림

작품 <1984>로 잘 알려진 조지 오웰은 글을 쓰는 이유를 네 가지로 요약했다.

첫째, 잘난 체하고 싶고 타인에게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다. 인간은 누구나 타인에게 자신의 존재가치를 인정받고 싶어 하는 욕구가 있다. 그것이 특별한 보상이 따르지 않아도 사회적 동물이 가지는 본능에 따른 것인지도 모른다.


둘째, 멋진 문장을 쓰고 싶은 마음, 즉 아름다움의 추구다. 누구나 멋진 문장이나 시를 보게 되면 부러움과 함께 자신도 따라 해보고 싶은 충동을 느낄 것이다.


셋째, 진실을 기록하려는 충동이다. 역사학자가 아니더라도 사회현상에 대해 기록하고 후세에 남기려는 마음을 가진 이들은 글을 쓰고자 하는 마음이 있을 것이다.


넷째, 정치적 목적으로 특정한 방향으로 사람들을 이끌려는 욕구다. 신문 사설도 그렇지만 많은 이들이 각종의 매체나 개인의 SNS 계정으로 '오피니언'을 쏟아내는 이유다.


여기에 더해 어떤 이들은 글을 쓰며 내면의 아픔을 치유하고 말하지 못하는 것들을 스스로 삼키는 과정으로 쓰기도 한다. 솔직한 문장이 감동을 주기도 하고 또 은유적이지만 뭔가를 함축한 멋진 글들은 심금을 울린다.


필명을 얻고 세상이 아는 작가가 된 이들은 많은 부러움을 사기도 하지만 행동 하나하나가 조심스러워지고 언행일치에 대한 부담도 커질 것이다. 최근에 만난 이는 그런 고민을 토로하고 세세한 가정사와 자신의 불균형한 상황들을 술의 힘을 빌어 털어놓았다.


그렇다. 불완전한 문장을 고치고 다듬는 것은 쉽지만 내 삶 앞에 느닷없이 나타난 울퉁불퉁한 요철들은 없애기 어렵고 피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그럼에도 우리는 성실히 극복하고 나아갈 의무가 있다. 우리에게 주어진 하루치의 삶은 하루살이에게는 전생애가 걸린 시간이다. 인간에게 주어진 100년이 안 되는 시간 또한 우주의 시간에 비하면 하루살이 정도에도 미치지 못한다.


대나무에 일정한 간격으로 마디가 있는 것이 신기하게 보인 적이 있다. 외부의 자극으로 만든 것이 아니지만 그런 마디가 생긴 건 환경에 적응하기 위한 몸부림처럼 보였다. 언젠가 생물학자가 했던 설명이 떠오른다. 곧고 길게 자라려고 바람에 부러지지 않게 대나무 스스로 단단하게 지탱하는 힘을 얻기 위해 마디가 생긴 것이라고 한다.


삶의 돌부리를 마주쳐도 길을 멈추며 대나무의 '마디'를 생각해 보면 어떨까. 글과 사색의 힘으로 내면을 돌아보고 우리에게 주어진 유한한 시간을 떠올려본다.


읽고 쓰며 사랑하고 감동하며 살아가는 일을 멈추는 순간 삶의 기둥뿌리는 흔들릴지도 모른다.



Kol Nidrei - LUKA SULIC - 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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