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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인간다움일까요?

by 호림

소크라테스의 제자 알키비아데스는 심포지엄 대담에서 소크라테스에게 말했습니다. 소크라테스가 언어의 힘으로 사람들을 마법에 걸리게 만들고 매혹한다고요. 결국 소크라테스는 사람들을 타락시켰다는 이유로 사형을 선고받았습니다. 저는 언젠가 최고의 인공지능을 갖춘 한 슈퍼컴퓨터와 소통할 기회가 있었고, 그때 저는 이런 질문을 던졌습니다. “철학은 마법인가?” 그랬더니 슈퍼컴퓨터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아니요. 철학은 마법이 아니라 학문입니다.” 최고의 인공지능이 어색한 목소리로 내놓은 답변이었습니다. 이게 무슨 답변이란 말입니까? 과학은 정말 바보 같습니다. 생각은 몸으로 하는 것입니다. 감정과 느낌으로, 죽음의 유한성을 통해서야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 생각의 음조> 한병철 지음, 최지수 옮김, 디플롯, p.121-122


읽은 책에서 멋진 문장이 있어서 길게 인용했습니다. 이 철학자의 지적에 마음이 절로 숙연해져서 경어체로 쓰게 됩니다. 우리의 생태적 몸은 생명유지를 위해서만이 아니라 우리의 생각을 넓고 깊게 하기 위해서도 대단히 중요하다는 생각입니다. 물론 거추장스러운 존재가 될 때도 있겠지요. 아프고 나이 들고 약해진 몸은 자신의 생각을 실현하기 힘들겠지만 그래도 그런 상태에서 독창적인 사고를 할 수는 있을 테니까요. 이 불완전함에 바로 인간의 가능성과 가치가 들어있는 것이 아닐까요


한병철은 발터 벤야민이 자살한 얘기를 꺼내면서 이런 말도 덧붙입니다.


성직자의 삶은 매우 행복할 거라고 말씀드렸지요. 그 이유는 부패하지 않은 이상적인 성직자는 초월한 삶을 살기 때문입니다. 소비사회이자 성과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는 초월성을 잃어버렸습니다. 초월성은 비현실적이라고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초월성은 소비, 성과, 생산의 내재적 특성들과 양립할 수 없습니다. 신은 소비행위를 하지 않지요. 생산행위도 하지 않습니다. 신의 창조는 성과가 아니라 사랑의 행위입니다. 우리는 오늘날 생산과 소비 안에서 근근이 연명하는 삶을 살 뿐입니다. 초월성 없는 삶은 욕구를 그때그때 충족하는 삶으로 축소합니다. 그러한 소비주의적인 삶, 초월성이 없는 삶은 행복 없는 삶이자, 부족하고 궁핍하고 가난하고 힘을 잃어 위축된 삶입니다. 이는 인간의 삶이라고 할 수 없고 그저 가축의 떼와 같은 삶일 뿐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모두 가축이 되었습니다. 소비의 떼, 커뮤니케이션의 떼, 데이터의 떼, 정보의 떼 등등.

-같은 책, p.126


한병철은 자신의 책에 사용할 사진을 독일 출신의 저명한 예술가 안젤름 키퍼에게 요청한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때 신속한 이메일로 받을 것을 기대했는데 이 대가의 친필 서명이 있는사진을 DHL소포로 편지와 함께 받은 일화를 소개하기도 합니다. 사연을 소개한 것은 자신의 하나의 '떼'로 취급받지 않았다는 맥락에서 뿌듯함을 느꼈기 때문이겠지요.


소비사회이자 성과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는 초월성을 잃어버렸습니다. 신은 소비행위를 하지 않지요. 생산행위도 하지 않습니다. 신의 창조는 성과가 아니라 사랑의 행위입니다. 우리는 오늘날 근근이 연명할 뿐입니다. 이는 가축의 떼와 같은 삶일 뿐입니다.

- 같은 책, p.132


진정성 있는 커뮤니케이션의 힘을 두 철학자와 예술가는 이해하고 서로 감응했던 것이 아닐까요. 저도 가끔 졸저를 선물할 때 SNS를 활용하기도 하지만, 어려운 분들에게는 직접 만나 책에 덕담과 사인을 해서 드립니다. 기계가 대체할 수 없는 인간의 일을 찾고 그 위엄과 권위를 지키는 일은 말라비틀어질 체면치레이거나 속물성을 포장하는 일만은 아닐 것입니다. 인간은 기계와 다르게 스스로의 품격을 생산성의 잣대가 아닌 것으로 지킬 수 있는 존재일 때 그 가치가 더욱 빛나니까요. 벨리니의 선울도 그런 면에서 기계음으로 화려하게 귓전을 때리는 음악과는 다른 멋을 느낄 수 있겠지요.





Angela Gheorghiu - Bellini: Vaga luna - recital in Los Angeles, March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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