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약이 발달했다고 해도 생로병사의 사이클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아직 없다. 벗의 때 이른 죽음은 유한한 삶을 다시 일깨워주었다. 망연자실한 가족들에게 위로의 말만 전하고 돌아오는 길에 '허무' 같은 단어들이 떠올랐다. 내세나 영생 같은 단어에 기댈 수 있다면 편리할 수 있어도 별다른 믿음이 없는 내게는 그저 영원한 고독으로 간 사람의 쓸쓸함이 허망할 뿐이다.
사회적 동물이라는 인간은 언제나 무리를 짓고 그 속에서 사랑하고 누군가에게 인정받고 싶어 하는 심리를 가진 경우가 많다. 그런 가운데 얻은 상처는 누군가에게 위로를 받고 또 반대의 경우엔 어떤 사람에게 위안을 주는 존재가 되어 살아간다. 그렇지만 때로는 고독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시간은 언제나 내면을 더 강하게 만들 수 있다.
인간의 모든 불행의 원인은 조용한 방에서 혼자 사색할 줄 모르는 데에서 출발한다는 어느 현인의 말이 떠오른다.
며칠간 아픔을 잊을 겸 좋아하는 선율이 흐르고 그토록 읽고 싶었던 책을 몰입해서 읽을 수 있는 아늑한 시간을 가졌다. 사람의 흔적이 없는 곳에서. 이렇게 화려한 고독이라면 언제나 즐기고 싶다. 빌 게이츠가 "씽크 위크"를 즐긴 것도 이런 차원이었을 것이라 짐작한다.
세상에서 시류를 따라 살기는 쉽다.
고독하게 살면서 자기 뜻에 따라 살기도 쉽다.
하지만 위대한 사람은 군중 속에서 참으로 우아하게
고독의 독립성을 지키는 사람이다.
- 랄프 왈도 애머슨
군중 속의 웅성거림을 벗어나 편견 없이 고독 속에서 자신의 고유한 관점을 형성한 대표적인 철학자이자 수필가는 미셸 드 몽테뉴다. 몽테뉴는 군중에 휩쓸리지 않으려는 의지를 창의적 성취의 중요한 수단으로 보았다. 실제로 귀족인 그의 후반생은 공직을 포기하고 드넓은 영지를 굽어보며 망루 위에서 고독 속에서 자신의 학문을 정립한 연구자의 삶이었다. 몽테뉴는 에세이에서 "군중 속에서 일어나는 전염은 매우 위험하다."며 경고한 바 있다.
독일 실존주의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는 말년의 역작 <존재와 시간>을 고독 속에서 집필했다. 이 저작물이 나오기까지는 10여 년의 세월이 필요했다. 그 시간은 대학 총장까지 마친 학자가 평생의 연구를 결산하기 위해 산속으로 들어가 외딴 오두막에서 보낸 고독 그 자체이기도 했다. 하이데거 이상의 '자연인' 헨리 데이비드 소로 또한 고독 속에 자신의 사상을 정립한 대가로 빼놓을 수 없다. 후일 D.H. 로렌스는 소로에게 영향을 받아 이렇게 고독의 가치를 평가하기도 했다.
오롯이 혼자 있으라. 그리고 살아 있는 우주가 조용히 흔들리는 것을 느껴보라.
한동한 친구의 죽음 속에 갇혀 있던 마음을 다시 추스를 수 있는 용기를 소설의 한 구절에서 얻었다. 스콧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에서 닉은 말한다. "우리는 그렇게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는 배처럼 끊임없이 과거로 밀려가면서도 앞으로 나아간다."
죽은 이는 가슴에 묻고 또 다른 미래를 만들려고 파도를 헤치고 노를 젓는 것은 산 사람의 몫이다. 내 졸문에 공감하고 의견을 주던 하나의 '우주'가 없어진 쓸쓸함을 작은 '고독'의 강을 건너며 극복하고 다시 노트북을 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