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피쿠로스와 파스칼의 견해를 빌리며
신은 악을 막을 의지는 있지만 능력은 없는 것인가? 그렇다면 그는 전능하지 않다.
그는 악을 막을 능력은 있지만 의지는 없는 것인가? 그렇다면 그는 악하다.
그는 악을 막을 능력도 있고 의지도 있는가? 그렇다면 악은 왜 생기는가?
그는 막을 능력도 없고 의지도 없는가? 그렇다면 그를 왜 신으로 불러야 하는가?
- 에피쿠로스의 질문
파스칼(Blaise Pascal)은 신의 존재를 '논리적으로 증명'하려고 한 철학자는 아니다. 다만 너무나 실용적인 논증을 해 주목을 끌었다. 그는 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 없다면, 믿는 것이 왜 합리적인 선택인지에 대해 설명했다.
다시 말해, 파스칼은 전통적인 신 존재 증명, 예를 들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일 원인론, 아우구스티누스의 존재론적 증명 등과 같은 엄숙한 섭리나 신앙을 바탕에 두지 않았다. 그들과 달리 우리 인간은 불확실성과 유한성 속에 사는 존재로 필히 실용적 선택을 할 수밖에 없다는 입장이다. 이것이 바 파스칼의 내기(Pascal’s Wager)로 알려진 신의 존재에 대한 논증이다.
파스칼은 신이 존재하는지를 우리는 이성으로 증명할 수 없지만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결정해야 한다면, 신을 믿는 것이 이익이라는 쪽이다.
파스칼은《팡세(Pensées)》에서 다음과 같은 논리를 펼친다.
첫째, 우리는 신이 존재하는지 확신할 수 없다.
인간의 이성은 무한한 존재(신)를 완전히 이해하거나 증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의 존재는 논리적 확실성이 아니라 실존적 선택의 문제이다.
둘째, 그렇지만 우리는 신이 존재한다고 "믿을지, 믿지 않을지" 결정해야 한다.
우리는 선택하지 않고는 살 수 없다. 믿음 자체도 일종의 ‘내기’인 것이다.
셋째, 그래서 파스칼은 기댓값의 계산에 대한 가상 시나리오를 정립한다.
요지는 우리가 신의 존재를 인정하고 믿으면 손해가 나지 않지만, 만약 믿지 않으면 천국에 가는 무한한 이익을 누리지 못하기에 손해라는 것이다. 따라서 합리적인 사람이라면 그 이익을 위해 인생의 자유나 자신의 소신을 일부 양보하고 믿는 쪽이 이익이라는 것이다.
이길 가능성이 큰 ‘내기’이기 때문에 파스칼의 관점을 취할 사람도 없지는 않겠지만, 집안의 분위기나 여러 이유로 특별히 골똘히 생각하지 않고 믿는 경우도 많을 것이다.
세계적으로 유신론자나 종교인의 영토는 점점 줄어드는 것이 통계상 확인되고 있다. 그렇지만, 유신론자들이 그 본질에 충실하다면 여러 장점이 있을 수 있다. 우선, 도덕적으로도 신이 모든 걸 지켜보고 있다고 느낀다면 행실에 좋은 영향을 줄 가능성도 있다. 심리적으로는 삶에 무한한 위안과 의미를 찾는 동기부여가 될 수 있으며 죽음에 대한 불안감도 경감시킬 개연성도 있다.
나아가 소속된 공동체의 유대감 형성을 강화하고 봉사활동 같은 공공선을 위한 모티브를 찾게 만드는 데에도 일정한 이점이 있을 것이다.
신을 대리한다는 사람들이나 신을 접했다고 선전하는 사람들의 상업적, 정치적 오염 또한 만만치 않은 세상이다. 파스칼의 생각을 따를지 고민이다. 쿠오바디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