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견의 다양성을 마주하니 인간의 객관성이라는 문제에 부딪힌다. 예술이나 인간사의 여러 문제들에는 얼마마 객관적인 평가가 가능할지 의문이다. 이런 문제를 고민하다 한나 아렌트와 톨스토이를 떠올렸다.
한나 아렌트는 독일 지식사회의 획일화된 사고방식에 반기를 든 여인이다. 완전히 독립된 의견, 객관성은 하나의 신화 일지 몰라도 지식인이라면 그것을 부단히 시도해야만 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2차 대전 전범 아돌프 아이히만이 수많은 사람을 처형한 장본인으로 판명되었지만, 그의 재판 진술이나 기록을 종합해 그녀는 '악의 평범성'이라는 유명한 개념을 끄집어낸다. 그가 결코 자기 조직의 상사를 살해하거나 주변인에 악행을 지지르지 않고 지시에 따랐던 평범한 조직의 세포라는 논리로 그를 변호하듯 말했기에 그녀는 지식인 사회에서 뭇매를 맞았다. 나아가 유대인이 좀 더 조직화되었더라면 아우슈비츠 희생자를 줄일 수 있었을 것이라는 말에 이르러서는 그는 신변의 안전을 걱정할 처지가 된다,
톨스토이를 세계 문학계의 보물로 여기지 않는 이도 드물다. 그렇지만 톨스토이는 강한 자기부정으로 자신의 작품이 아무것도 아니고 심지어 셰익스피어도 별것 아닌 것으로 말년에 자신의 문학 나아가 세계문학 전반에 대한 강한 부정에 이르렀다. 공동체의 공공선에 깊이 몰입한 이 대문호는 살아서 이미 신화가 된 자신을 포함한 개인의 신격화에 가까운 찬미에 역겨움을 느끼고 진정한 예술이 무엇인지를 죽을 때까지 고민했다. 톨스토이는 말년에 '공공예술'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주창한다. 그가 말한 이 개념은 100여 년이 지나서 지금 재조명되고 있다.
예술도 문학도 '절대' 이거나 최고의 경지라고 숭배하는 것이 과연 타당할까 하는 생각이 든다. 지식이나 사고의 한계가 그 사람의 한계이기에 부단히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과 검증의 무대에 서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될 것이다. 연령이나 세대, 성별이 다른 형식적 요인은 물론 생각의 결이 다른 사람을 만나면 늘 배우는 것이 있다.
지혜롭게 배우는 방법은 한나 아렌트처럼 언제나 집단이나 스스로의 생각의 틀에서 빠져나올 준비가 된 마음의 상태가 아닐까. '후생가외'의 경우를 보거나 '낭중지추'의 식견을 지닌 사람을 만나는 건 늘 정신에 자극제가 되는 신선할 즐거움이다.
톨스토이의 처절한 자기부정, 한나 아렌트의 기존의 관습을 철저히 거부하는 지적인 '결기'를 따라가기는 힘들지도 모른다. 그래도 우리는 누구나 자신이 철저히 틀릴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할 순간을 당당하게 받아들여야만 한 단계 더 도약할 수 있다.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하는 존재다.
-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여든이 넘어 생의 말년에 <파우스트>를 쓰며 진정한 삶과 예술, 문학의 자리를 처절하게 고민해 방황할 수밖에 없었던 괴테의 삶도 그래서 아름다운 것이 아닐까.
어쩌면 지성인으로서 통찰의 날카로움을 잃지 않으려는 사람은 아마도 끝까지 득도한 선승과도 같은 미소로 호수처럼 평온하게 사는 모습과는 거리가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톨스토이와 괴테의 그림자를 밟을 자격조차 있는지 모르지만, 그런 자세를 따라 하려는 마음으로 가득하고
지적인 허기에 시달리는 삶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스스로의 노력이 스며든 책이 탄생하는 순간을 자식이 태어나는 순간에 비유하는 이도 있다. 그런데 그 냉정한 평가는 언제나 독자의 몫이다. 책 표지를 가다듬을 시간은 언제나 설렘과 두려움이 교차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