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력을 잃고 안마사라는 직업을 가졌지만 거기서 한 발짝 더 나아가 소설가가 된 조승리 작가가 있다. <나의 어린 어둠>은 작가가 자신에게만 유독 그렇게나 가혹한 인생에 대해 투덜거리면서도 삶의 아름다움을 얘기한다. 소설을 읽다 베토벤을 떠올렸다.
눈이 멀쩡한 내가 타인들에게 헬렌켈러를 얘기하고 캄캄한 세상에서 빛을 보라는 말은 사치스러운 교훈으로 들릴지도 모른다. 베토벤은 음악으로 말하고 있다.
우리가 흔히 베토벤의 위대성을 말할 때 그의 작품의 탁월함과 함께 청력상실의 악조건을 딛고 합창교향곡 같은 대작품을 만들었다는 점도 높이 평가하기 때문일 것이다.
살아서 긴 시간 영화를 누린 예술가들도 많지만 베토벤 생전에 있었던 짧은 영광의 순간은 긴 고뇌의 시간을 필요로 했다. 베토벤이 1802년에 쓴 하일리겐슈타트 유서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오 인간들아. 너희는 내게 적개심에 차 있고 고집불통에 인간을 혐오하는 성격이라 여기겠지.
......
이제 귀까지 들리지 않는다는 슬픈 현실은 얼마나 내게 가혹한 충격인지, 신이여 당신은 제 마음을 굽어보시지요. 당신은 제 마음속 인류애와 선해지려는 욕구를 알고 계시지요. 오, 인간들이여 언젠가 이 글을 읽는다면, 그대들이 나에게 얼마나 부당했는지 생각해 주오.
- <베토벤> 마르틴 게크 지음, 마성일 옮김, 북캠퍼스, p.93
베토벤 연구에 몇 년을 바친 평론가 노먼 러브레히트는 말한다.
흔히 전기 작가들이 묘사하는 베토벤은 제멋대로 굴고, 단정치 못하고 아랫사람을 괴롭히고, 친구들에게 무례한, 한마디로 알고 싶지 않은 사람이다. 하지만 베토벤과 함께 2년을 보내고 나니 내게는 그가 거의 이상적인 인간으로 비친다. 그의 운명에 굴하지 않았고, 놀라우리만치 독립적이었으며, 교회나 국가에 고개 숙이지 않았다. 하나의 곡을 마치면 누가 값을 지불하게 될지 모르는 채로 다음 곡을 작업했다. 그는 매일 자신이 더 잘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비평가와 팬을 똑같이 경멸했다.
- <왜 베토벤인가> 노먼 러브레히트 지음, 장호연 옮김, 에포크 p.12
그는 교회 질서에 종속되거나 군주에게 무릎을 꿇고 일감을 따려 하지 않았다. 결코 가볍게 인기에 영합하지 않았다. 청력 상실이리는 신체의 한계조차 베토벤이 '음악의 신'을 경배하는 과정에 장애물이 될 수 없었다.
클래식의 '클'자는 안다고 할 수 있는 사람으로서 베토벤의 곡이 들어도 들어도 질리지 않는 건 어떤 이유에서 일까? 자문해 본다. 글렌 굴드는 말한다.
베토벤은 자신을 틀에 가두지 않는다. 앞으로도 그의 음악을 규정하려는 시도는 번번이 실패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