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팬지와 인간을 구별하는 것은 창의성이다. 창의성은 어떻게 발휘될까. 어찌 보면 발명왕 에디슨은 창의성의 상징적인 대가일 수 있다. 에디슨의 특허를 1,037개를 가졌다. 알려진 대로 그는 청각장애가 있었고, 학교도 거의 다니지 못했다. 학교 교육이 모든 게 아니라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자신 안에 있는 창의성은 결코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양질의 교육으로만 발현될 수 없을 것이다.
에디슨은 이른바 ‘저수지 발상’을 통해 여러 가지 문제를 한꺼번에 끄집어 내놓고 컴퓨터의 멀티 태스킹 작업처럼 사고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 결과 여러 갈래의 연관성도 찾고 새로운 것을 찾아내는 발상법을 취했다는 것이다. 물론 집중력과 호기심 같은 요소는 기본으로 에디슨을 따라다녔을 것이다. 그런 에디슨을 학교 교육에 묶어두었다면 아마 평범한 수재는 될지 몰라도 인류사의 발명왕까지는 힘들 수 있었을 것이다.
베토벤은 그 삶을 그린 영화나 전기로 잘 알려진 대로 독신의 온통 헝클어진 머리를 쥐어뜯으며 넉넉지 않은 형편의 꼬질꼬질한 삶이 연상된다. 그렇지만 초 몰입의 경지로 만들어낸 음악들은 지금도 많은 이들을 감동시킨다. 당시에 발표해 크게 인정받지 못해도 베토벤은 “이건 미래세대를 위한 음악”이라는 식으로 말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연구자로 많은 성과를 올린 사람들의 얘기를 종합하면 퀀텀 점프를 하는 이른바 미친 날(crazy day)이 있다는 것이다. 깊은 사색과 몰입을 통해 아르키메데스의 유레카의 순간과 비슷한 날을 만든 것이다. 많은 독서와 연구는 어느 순간 지성이 폭발하는 단계를 만날 수 있다는 석학들의 얘기도 들린다.
에디슨처럼 ‘저수지형’ 작업으로 저수지에 뭔가를 많이 가둬둘 수 있는 지성의 총량과 절대 몰입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아마도 베토벤도 마음에 쏙 들지 않았던 악보를 영화의 한 장면처럼 박박 찢으면서 머릿속에 가둬두었다가 여러 가지 악상들과 조합했으리라 짐작한다. 소나타 형식이나 이런저런 배치를 통해 독특하고 창의적인 ‘프레이즈’를 만들고 이것을 연결했을지도 모른다.
인류의 천재를 얘기할 때 단골로 등장하는 사람이 레오나르도 다빈치다. 회화, 조각, 건축에 걸쳐 실로 방대한 업적을 남긴 다빈치는 사생아에 동성애자로 당시 사회에서 그렇게 환영받지 못하는 처지였다. 러시아의 천재 작곡가 차이코프스키도 동성애자로 원하지 않은 결혼 후 자살소동을 피우기도 했고 삶이 순탄하지는 않았다.
천재들의 삶을 들여다보면 공통적으로 느낄 수 있는 것이 강력한 호기심과 놀라울 정도의 몰입이다. 그들은 아마도 현세의 세속적 행복을 유예할 정도로 극도의 몰입을 통해 작품과 함께 죽어서도 영원히 사는 쪽을 택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평범하게 표준편차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 삶이 행복할 수도 있다. 그런데 그 속에 어떤 갈구가 없다면 삶의 목적에 대해 회의하는 순간이 언젠가는 올지도 모른다. 그 순간이 무덤 바로 앞에서 찾아온다면 얼마나 불행할까.
스티브 잡스의 항상 우직하게 갈구하라(Stay hungry stay foolish.)는 말은 아무리 생각해도 명언이다. 코로나19에 폭염으로 만남과 활동이 많이 제약된 상황이다. 달리 생각하면 혼자만의 깊은 사색의 기회이기도 하다.
인류사에 획을 그은 사람들의 삶을 들여다보면서 결코 기름진 음식과 살찐 소파에서 찾을 수 없는 다른 차원의 행복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을 가져본다.
차원이 다른 어떤 것에 대한 갈구, 그것이 없다면 우린 아마 침팬지와 유사한 수준에서 썩 많이 나아갔다고 쉽게 대답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