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만한 영화가 없을 때는 한때 보았거나 봤어야 하는데 보지 못한 영화를 인터넷으로 다운로드해서 볼 때가 있다. 왕가위 감독의 <해피 투게더>는 여운이 남는 유별난 사랑 이야기다. 감독은 왜 하고많은 세상의 도시 중에 홍콩과 대척점에 있는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를 택했을까.
동성애자 보영(장궈룽 분)과 아휘(링차오 웨이 분)는 이과수 폭포로 가는 길에 고장 난 중고차처럼 덜컹거리며 삐걱대는 서로의 싫증 난 마음을 사정없이 뱉어낸다. 사랑의 이름으로 껴안고 살았지만, 그동안 쌓아두었던 나쁜 감정들도 이과수 폭포처럼 쏟아진다. 정작 폭포는 보지도 못하고 두 사람은 헤어진다.
극도로 먼 나라에서의 극한의 고독과 사랑, 그것도 환영받지 못하고 음습하게 느껴지는 동성애자의 사랑과 갈등. 이런 것들이 영화를 보는 내내 연민을 일으켰다. 이성애를 같은 스토리 라인에 대입하면 그런 쓸쓸함과 절절한 감정을 그리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보영과 아휘는 사회의 소수자로 상처 받고 사는 약한 영혼들이다. 정작 서로에게서 따뜻한 위로의 손길을 갈구하지만 둘 사이엔 한시도 바람 잘 날 없이 폭풍전야 같은 긴장이 흐르는 연인들이다.
유독 기억에 선명한 장면이 있다. 항상 꾸미길 좋아하고 바깥 구경을 좋아하는 보영. 듬직한 살림꾼 아휘. 어느 날 보영의 요구로 간 둘의 산책길에서 걸린 감기몸살로 앓아누울 정도가 된 아휘에게 보영이 배고프다고 칭얼댄다. 생활인으로 무력한 보영에게 아휘는 “너도 인간이냐 이 몹쓸 놈아” 같은 톤의 욕을 쏟아붓고도 열심히 챙긴다. 매번 그랬듯 이불을 몸에 칭칭 감고도 요리를 해서 보영에게 갇다바치는 아휘의 모습에 사랑이 읽힌다.
순간 어떤 선배의 이야기가 스쳐갔다. 대기업의 중견간부로 주말에 지친 심신을 추스르려 소파에서 쉬고 있었다. 이때 휴식을 방해하는 성가신 존재인 반려고양이 두 마리를 물리치자 딸과 아내가 토라졌다. 순간 언젠가 다친 고양이 치료에는 수백만 원을 썼지만 정작 어머니 용돈 얼마에 인색했던 가족들이 원망스러웠다고 한다. 선배는 그렇지만 어느새 그 삶에 길들여져 있는 듯 궤도를 벗어나지 못하는 스스로를 탓하며 술잔을 비웠다.
사랑의 마음은 불타는 욕망이나 낭만 같은 단어에도 들어있겠지만, 때로는 끝없는 희생과 연민, 질투 같은 단어 속에 더 많이 들어있을 수 있지 않을까. 아니면 말로 표현하다가 항상 그 부정확함에 놀라게 되는 것이 사랑의 본질인지도 모른다. 어떤 형태의 사랑이건 간에.
아무리 성인군자들이라도 둘이 만나 부대끼며 살다 보면 영원한 ‘해피 투게더’는 힘들 것이다. 우린 서로 서운해하고 상처를 주고받으며 또 상처를 치료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다만 서로가 공존의 지혜를 잃지 않는 길은 ‘다름’을 인정하는 것이 아닐까. 실은 우린 만나면서 서로가 그 다름을 좋아했는지도 모른다. 보영과 아휘처럼 ‘극단의 다름’ 까지는 아니더라도.
그 다름을 보듬고 살지 못하면 헤어져 각자가 따로 행복하면 될 일이다. 해피 이치 아더(Happy each other) 면 어떨까. 굳이 ‘투게더’가 아니면 어떤가. 놓아줄 사람은 놓아주고 각자의 길에서 행복할 수도 있지 않을까.
아무런 감정의 기복이 없는 안온한 사랑도 있을 수 있다. 어쩌면 사랑의 밀도는 어떤 극단의 처절한 감정의 진폭 속에서 더 절실하지 않을까. 그래서 왕가위 감독은 그 극단의 진폭을 맛보라고 지구 상에서 홍콩과 대척점에 있는 도시로 두 동성애자를 끌고 갔는지도 모른다. 두 사람을 쉽게 다시 돌아가지도 못하는 처지로 몰아가며.
오늘 밤도 여기저기 새어 나오는 도시의 불빛을 멀리서 본다. 저 많은 빌딩과 아파트 불빛이 이과수 폭포처럼
멋진 야경을 연출하고 있다. 그 속에는 아마도 무수한 아픔이 들어있을 수도 있다. 천 길 낭떠러지를 내려가는 아픔도.
날이 밝으면 저 불빛 속의 사람들은 한 길 사람 속을 잘 모르면서도 서로 사랑한다고 좋아한다고 볼을 부비고 입을 맞추고 살아갈 것이다
천 길 폭포수처럼 추락하다가도 그 사람만 보면 한없이 비상하는 느낌을 우리는 사랑이라 부르며 서로 부대끼며 살아가는 건 아닐까.
우리가 오래도록 더불어 행복할 수 있는 대상은 누구일까. 진정 사랑하는 사람은 헤어져 있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보영과 아휘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