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 앞의 피아니시모

by 호림

초의 선사는 추사가 죽고 두 해 뒤에

망자의 묘 앞에서 말했다고 한다.

꽃이 고우면 비가 내리는 법이구나.

- 김진영 <아침의 피아노> P.192


사망선고와도 같은 불치병을 안고 사는 사람은

어떤 심정일지 짐작만 하지만

절제된 산문으로 삶의 가치를 노래한 글이

울림을 줍니다.

철학자 김진영이 쓴 <아침의 피아노> 에는

피아노가 없지만, 피아노가 있습니다.

음악을 얘기하거나

그랜드 피아노 선율을 들려주지는 않았지만

피아노는

셈여림 기호 '피아니시모'에서 나왔기에

여리고 약하게 담담하게 쓴 글이

마음을 아프게 했기 때문입니다.


책 가운데

청춘의 용광로가 뜨거웠던 시절

이심전심의 정서가 깃든

문구도 발견했습니다.

내 안에 텅 빈 곳이 있었다.

돌아보면 그 텅 빈 곳을 채우기 위해

돌아다녔던 세월이 나의 인생이었다.

도서관을 헤매던 지식들,

애타게 찾아다녔던 사람들,

미친 듯이 자신에게 퍼부었던 히스테리들,

끝없이 함몰했던 막막한 꿈들......

그것들은 모두가 이 텅 빈 곳을 채워서

그 바람 소리를 듣지 않으려는

몸부림들이었다.

그러나 그 무엇도

그 텅 빈 곳을 채울 수 없는 걸까.

이제 남은 시간은 부족한데

과연 나는

그 텅 빈 곳의 주인을 찾을 수 있을까.

- 김진영 <아침의 피아노> P.144


어느 철학자의 산문이

초저녁을 쓸쓸하게 만들 때

비가 내렸고

친구는 비가 내려서

보고 싶다고 달려왔습니다.

술이 고프다고 했지만

실은 우정 한 모금에 대한

갈증이 있음을 짐작했습니다.

그런 친구가 있는 삶에 감사했습니다.

실없고 대책 없어 보이는 친구에게

다른 이유는 묻지 않았습니다.

친구의 사정을 아는지라

도시의 팍팍한 삶에

우정이라는 단비를 원할지도 모르는

이 낭만파의 마음을 헤아리기로 했습니다.


우정이 비처럼 마음을 적시는 날

내 삶의 총총한 걸음을 멈추고

계획된 일거리를 잠시 미뤄둔 채

하룻밤을 뚝 잘라내 친구와 보내는 일을

누가 실없는 일이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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