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처럼 오래된 앨범을 끄집어내 보았습니다.
빛이 바랜 색깔만큼이나 기억도 희미해져 가는 순간들도 있지만 그 시간을 선명한 기억으로 떠올리게 하는 장면도 있었습니다. 오래전 모습이라 차림새가 세련미와는 거리가 있지만 그 시절의 추억은 늘 잔잔한 미소를 머금게 합니다. 군에서 제대할 때 추억록을 만들어주던 졸병들도 보고 싶어졌습니다. 사진 한 장은 많은 스토리를 품고 있었습니다.
아쉬운 건 추억의 몇 무더기가 빠져 있다는 것입니다. 흔치 않은 아프리카 출장과 두바이 사막 투어의 여러 풍경을 기록한 사진은 잃어버린 노트북과 함께 유실됐습니다. 세미나로 갔던 스톡홀름과 북유럽 도시들의 풍경도
사진 파일에서 보이지 않습니다. 편리한 디지털은 이렇게 한순간 모든 것을 날리기도 합니다.
그래서 아날로그식 앨범으로 보관해둔 것이 오래 남아있는 역설도 있습니다. 앨범으로 만져보고 느끼는 것과 파일로 저장해두는 것은 분명 차이가 있습니다. 아날로그는 불편하고 느린 것을 상징하기도 하지만 그 독특한 정서는 디지털이 대체할 수 없는 부분이겠죠.
LP판의 ‘지지직’ 하는 잡음 소리가 어떤 경우 더 정겨울 수도 있기에 또 다른 감성을 자극합니다. 소리공학적으로 LP판의 편안함을 연구하는 사람도 있고 일부 마니아들이 LP판 음악을 듣기 위해 판을 구입하기에 몇 년 전 폐쇄된 LP판 공장이 다시 가동했다는 소식도 들었습니다. 아직도 황학동 중고시장이나 카페에서 앤틱 분위기를 내는 장식용으로 턴테이블이 보입니다.
디지털은 기계문명으로 편리함을 안겨주지만 그 극단으로 가면 기술만능주의에 대한 안티테제로 아날로그에 대한 향수가 등장합니다.
디지털은 0과 1의 오차를 용납하지 않는 세계이지만 거기에 더해 아날로그의 감성을 정교히 수용할 태세입니다. 이미 음성인식 기술이나 AI의 여러 기능들이 아날로그를 수용하고 있지만 인간이 빚어낸 예술의 향기를 완전히 힘들 것입니다. AI가 그린 회화가 소더비 경매에 나오고 소설이 등장하기는 하지만요. 실수조차도 하나의 예술이 아닐까요.
인간의 삶은 크고 작은 실수의 연속입니다. 에러가 나면 작동이 안 되는 디지털 세상과는 다릅니다. 인간은 궁극적으로 아날로그이기에 에러가 나도 계속 시도합니다. 우리는 크고 작은 실패 속에서 살지만 그것이 삶이 아닐까 합니다.
베토벤이 머리를 쥐어뜯으며 작곡한 곡보다 AI가 더 아름다운 곡을 쓸 수 있을까요. 다빈치가 그린 모나리자의 예술성은 디지털로 구현될 수 있을까요. 아마도 가능할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아직은 인간이 가진 아우라, 무수한 스토리가 주는 아날로그적 감성을 디지털로 단박에 구현한다고 그것이 예술의 감동을 안겨줄지는 미지수입니다..
AI가 포디엄위에 설 수 있지만 카라얀과 토스카니니의 카리스마를 대신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경계에 살 수밖에 없습니다.
완전한 디지털은 모든 걸 구현할 수 있을 것처럼 기대를 부풀리지만 아마 뜨거운 혈액이 흐르는 인간의 심장이 없는 한 결코 인간을 대신할 수 없을 것입니다.
친구가 인터넷에 떠도는 내 사진이 영 아니라며 유명한 스튜디오에 가서 같이 찍자고 합니다. 이모저모 연출되었어도 맘에 드는 컷이 있어서 자나 깨나 아들 걱정인 어머니 댁에 작은 액자로 갖다 놓았습니다. 책도 전자책이 지식을 흡수하게 할 수는 있겠지만 종이책의 감성과 물성(物性)을 느끼게 할 수는 없울 것입니다.
만년필 손글씨로 지인 한 명 한 명에게 연하장을 직접 써 주시는 기업체 대표를 알고 있습니다. 대량 인쇄본으로 배포하는 것과는 받을 때의 느낌이 다릅니다.
얼마 전 아끼는 친구에게 휴대폰에 담긴 사진을 컵에 프린팅 해서 이 컵으로 커피 한 잔 하며 네 멋진 모습을 감상하라며 전해주었습니다.
아날로그의 향기는 언제나 서로의 체온을 전할 수 있게 합니다. 간혹 인사로 개성 없는 단체문자를 남발하는 친구를 봅니다. 아날로그 감성의 정성이 없다면 인간의 심장은 쉽게 뛰기 힘들 것입니다. 아날로그 감성의 정점에 아마도 예술이 자리 잡고 있을 것입니다.
가을입니다.
컴퓨터, 텔레비전, 휴대폰, 인터넷이 점령했던 우리의 시간에 숲길 산책, 클래식 음악, 갤러리 전시, 책 읽기를 집어넣으면 어떨까 합니다. 아마 디지털 디톡스가 되고 아날로그 감성은 좀 더 올라가지 않을까요.